"인젠 생리가 더 이상 올 거 같지 않네요. 자궁벽이 두텁지 않고, 자궁크기도 줄어들었습니다."
몇달째 끊긴 생리걱정보다도 란소암으로 돌아가신 엄마의 유전 같은 거라도 있을까봐 병원을 찾은 나에게 초음파검진을 끝낸 의사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다.
예상 못했던 건 아니지만 또 녀자라면 누구나 꼭 한번은 겪는 일이지만 그것도10월의 마지막 날에 이젠 블랙홀이 없는 여자가 아닌 그저 늙은 녀인으로 남게 되였다는 판결이 왠지 마음이 씁쓸하다.
백세인생시대에 마흔아홉이면 아직 청춘인데, 이 나이에 아직 막둥이를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도 아직은 멋있는 남자를 대하면 수줍어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벌렁거리는데, 또래 친구들은 거침없이 생겨나는 흰 머리칼 땜에 스트레스 받아도 난 아직 흰 머리칼 한올도 찾아볼 수 없는데 그리고 아직은 약병에 적힌 깨알 같은 글자도 돋보기 없이 읽어낼 수 있는데 벌써 블랙홀이 말라간다니?…
어제가 이팔청춘 꽃 나이같은데 벌써 지천명이라니. 뭐가 그리 급해서 허겁지겁 나이를 집어삼켜 흰서리까지 이마를 덮게 만들었나.
지난 세월 채이고 긁히고 뒹굴어 온몸에 상처자욱 랑자한데 화려한 가죽이 나를 비웃는구나. 아직도 남은 허영을 버리지 못하고 애써 욕망을 짓누르며 살고 있다는 반증일가.
차갑게 불어치는 바람에 찟기워도 나랑 상관도 없이 겨울나무처럼 살가죽 터가면서도 뿌리만을 굳게 지키면서 살아야 했음을 왜 이제야 깨닫게 되는지, 맞받아 바람을 막으려면 나만 지치고 아프다는 것을 왜 이제야 알게 되는지.
삶은 급행렬차에 탑승한 것과 다름없다.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몇 개나 견뎌내야 찬란한 해살줄기를 맞이할 수 있을소냐. 지친 몸 이젠 쉬고 싶구나.
어느 이름모를 정거장에 멈춰서서 기다림도 미련도 없이 지나온 내 발자취만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하얀 눈이 더럽혀진 대지를 살포시 감싸준다.
명절날 저녁밥상인데 또 혼자만의 저녁이다. 설날이라 지지고 볶고 한참을 법석여 고추볶음, 김치볶음, 닭알지짐, 명태구이…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놓았지만 막상 먹으려고보니 혼자만의 저녁이다.
랭면 반사발 말아서 고추볶음에 대충 저녁을 때우노라니 갑자기 눈물이 난다.
설날은 가족모임의 명절이라는데 나의 설날은 이게 뭐냐? 하는 설음에 절로 눈물이 난다.
아버지만 계셨어도 이 정도가 아닐텐데…
갑자기 아버지가 너무 그리웠다.
아버지만 계셨어도 설날이 설날같지 않은 일이 없을테고, 아버지만 계셔도 집안이 집안같지 않은 일이 없을테고 아버지만 계셔도 화기애애 가족분위기가 감돌았을텐데 하는 생각으로 자꾸만 눈물이 솟구쳤다.
음력설을 맞이한 기억 속에도 제일 잊혀지지 않는 것은 1970년대 초, 혁명이 지속될 수록 생산은 떨어지던 때였다. 그 때는 북방에 과일이 흔치 않아 명절 림박이라야 조금 맛볼 수 있었는데 질좋은 사과나 배는 거의 구경도 할 수 없고 꽁꽁 얼어서 돌멩이같은 언배조차 일반인에게 차례지기쉽지 않았다.
1973년, 설명절을 앞둔 어느날 공급판매합작사에 언배가 많이 왔다는 귀소문을 듣고 나는 아침 일찍 빈 가방을 메고 갔다. 언배라도 넉넉히 사서 설명절 선물로 아이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였다.
공급판매합작사에 이르니 나처럼 소문을 듣고 모여온 사람들로 아침부터 붐비였는데 서로들 먼저 사겠다고 밀고 닥치며 아우성을 쳤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공급판매합작사 점원은 사람들에게 상자 안에 들어있는 종이쪽지를 한장씩 쥐게 하고 그 종이에 적힌 순서에 따라 1번부처 차례차례로 언배를 사게 했다. 그때 나에게 차례진 것은 50번이였다. 별로 희망이 없었으나 그래도 행여나 하고 기다렸는데 공교롭게도 내 앞 번호인 49번까지 배를 사고나니 배가 똑 떨어졌다. 참으로 맹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언배를 못 샀으니 집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집에서 이버지가 배를 사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릴 아이들 앞에 빈가방을 내놓을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망설여졌다.
한때 우리집 창가에 비둘기 몇마리가 자주 와서 구구거렸다. 처음에는 그렇겠거니 했는데 계속 오니 녀석들이 귀엽고 고마와서 먹거리를 뿌려주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이 녀석들이 매일 찾아오는 게 아닌가. 재미들어서 나도 계속 모이를 주었다. 한 2, 3년 됐을가. 나는 그렇게 신들린 듯 비둘기 모이를 주었고 비둘기들 역시 거의 반사적(이건 순전히 내 느낌이다)으로 나를 찾아왔다.
한번은 눈이 엄청 온 날이였는데 비둘기 한마리가 베란다 귀퉁이에서 집안을 말똥히 들여다보다가 나와 눈이 맞추치자 무슨 할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고개마저 주억거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아, 고놈 참 신통한데. 나는 그날 그렇게 오래도록 비둘기와 눈길로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비둘기들이 무슨 영문인지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발길을 끊었다. 혹시 무슨 사고라도 생긴 건 아닐가? 은근히 조바심이 났지만 별다른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다시 더 소식이 없었다.
그윽하고 고요한 이 밤, 환하게 웃고있는 달. 사위를 바라보니 모든 것은 달빛과 밤의 융합속에 자욱하다. 바람은 사색에 잠기고 사람은 꿈 나라에서 헤맨다. 저 멀리 시골 마을은 신비하고 짙은 어둠 속에 숨겼는데 나무는 짙푸르고 길은 아득하다.
시같고 그림같은 들판에서 묵묵히 맑고 깨끗한 달의 얼굴을 주시하노라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이고 사색의 날개가 청량한 밤바람 속에서 날아옌다. 처녀처럼 어여쁜 달빛이 담담히 나의 몸에 비추니 나는 너의 손을 잡고 이 인적이 없는 광야에서 온 밤 유쾌히 거닐다가 두팔을 벌려 함께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고 싶고나. 천지 만물이 모두 잠자는 시간 나와 네가 캄캄한 어둠속에서 조용히 심령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
달빛은 나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리고 나의 얼굴을 뜨겁게 키스해준다. 저 멀리 높이 자란 상사수 밑에서 한쌍의 련인이 소곤소곤 사랑을 토로하는데 마치 향기로운 꽃잎이 시내물에 떨어지듯 아렴풋이 단속적으로 이어진다. 이때 나는 갈대잎을 뜯어 피리를 만들어 망망한 하늘을 향해 나의 기쁨, 나의 슬픔, 나의 꿈노래를 불렀다. 이때 사색은 멀리 멀리 날려 방불히 내가 즐거운 피리소리에서 모든 세계를 차지한듯했다.
주인이 버린 흙만 있는 화분에서
풀들이 씩씩하게 자라고 있다
씨앗이 바람에 실려와 떨어졌는지
흙들이 잠든 사이
새들이 몰래 물어왔는지
뿌리를 깊숙히 내렸다
비록 물을 주는 놈도 없고
거들떠보는 놈도 없건만
하늘을 향하여 맑게 웃는다
바람과 정담을 나눈다
뜨개질
나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뜨개질을 잘하심을 비밀에 붙혔다
왜?
부끄러워서
그러나
지금은 아버지의 솜씨가 그리워진다
나 개구쟁이 시절부터
아버지는 나에게 장갑, 양말, 내복을 뜨개질로 지어주셨다
인생은 한부의 소설입니다
울고 웃는 주인공
등장할 때는 자기가 울고
퇴장할 때는 남을 울립니다
장절도 자연스럽게 나눠집니다
유년 소년 청년 장년 로년
매장마다 에피소드가 엮어집니다
사랑도 슬픔도 미움도 아픔도
장이면 장마다 절이면 절마다
희노애락이 살아 숨쉬는
자욱마다 씌여지는 인생의 진실한 력사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탈고되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