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이란 말을 농촌에서 지금도 쓰는지 모르겠다. 어릴 때 고향마을에 있을 때10월이 되면 화목 주간이 있었다. 화목이란 불을 땔 감 즉 땔나무라는 뜻이다. 내가 어릴 때 농촌에는 석탄을 때는 집이 극히 적었다. 집집마다 온돌방이 있는데 불 땔 감이라고는 들에 나는 새나무, 쑥대, 그외에 생산대에서 탈곡이 끝난 다음 나누어 주는 벼짚 북데기였다. 우리가 사는 고장은 버덕이라 장작이 거의 없었다. 또 그 때의 살림형편으로 개인집에서 석탄을 사서 땐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였다. 지금 은 벼짚도 안때고 거의 밭에서 태워버리지만. 소가 절반 로동력이였던 그때 벼짚은 생산대의 소먹이로 매우 귀중한 존재였다. 그리고 어쩌다 집집에 나누어주는 벼짚은 부업으로 가마니를 짜서 돈잎을 만들다나니 언제 부엌아궁이에 들어갈 것이 있었겠 는가?
화목주간이 되면 우리집에서는 아버지를 비롯해서 오빠, 언니하고 점심을 사가지 고 새밭에 간다. 엄마는 휴식 짬에 먹으라고 작은 사과랑 점심 가방에 넣어주군 했다. 그때 내나이 열두어살이라 새나무는 베지 못하고 묶어놓은 나무단이나 나르면서 점심참을 축내는 것이 고작이였다. 하지만 나무단을 나르는 것보다 더 신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무져놓은 나무무지에서 뒹굴며 노는 것도, 풀떡 풀떡 뛰는 베짱이를 잡는 것도 아닌 새밭에 물이 고인 곳에서 와글와글한 고기새끼들을 줏는 일이였다. 그래서인지 화목주간은 나의 동년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당신은 민들레를 즐기는가? 난 민들레를 좋아한다.
우선 민들레는 순수한 자연의 먹거리를 선사한다. 민들레는 가장 이른 봄부터 겨우내 얼고 잠들고 굳어진 흙 속에서 자기 속에 간직했던 에너지를 방출하여 오불꼬불 틈새를 비집고 기어코 땅우로 올라와서 인간들에게 엽록소를 선사한다. 봄임을 광고한다. 민들레는 아마 태여나는 날부터 꽃망울을 잉태하고 있는 것 같다. 옛날에는 멋 모르고 꽃망울을 버리고 이파리만 먹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모조리 먹는다. 날 것으로 쌈을 싸거나 초장에 찍어 먹으면 민들레의 개성적인 맛이 더 선명하고 양념에 무쳐 먹어도 그저그만이다. 그렇게 입맛이 거뿐할 수가 없다. 밥도둑이다. 실로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를 지경이다.
아버지와 밥상에 마주앉으면 물김치를 자시는 아버지의 입다심 소리에 공연히 식욕이 발동해 아버지 본새로 정신없이 물김치를 퍼먹다가 사레가 들어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면 아버지는 자기 그릇에 있는 감자를 내 밥사발에 놓아주면서 거쿨진 손으로 내 잔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불알친구들과 혹부리할매네 살구를 훔쳐 먹던 날은 오이꽃처럼 순한 어머니 눈보다 피마주 열매같은 아버지의 눈길이 떠올라 공연히 불안해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아버지의 눈길을 피한다. 아버지의 기침소리에도 화들짝 놀라 고추에서 오줌을 찔끔 흘리며 다시는 혹부리할매네 살구를 넘보지 못했다.
요즘 사람들은 온몸이 땡볕에 찌물쿠는 여름철이나 추운 겨울날이면 해장 뒤끝으로 가끔 시원한 연길랭면을 찾는 습관이 있다. 새콤하고 매운 맛이 깃들어 얼큰한 느낌이 드는 육수가 컬컬해난 위장도를 쩡-소리나게 뚫어줄 때 그 맛의 통쾌함에 육신이 거뜬해진다.
내가 처음 연길랭면을 먹어본 것은 지난70년도였다.3월달 초봄날씨치고 매서운 꽃샘추위에 온몸이 으스스 떨리던 어느날 점심무렵, 출근했던 아버지가 문뜩 집에 들어서며 국수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나는 엄마가 평소에 만들어주는 강냉이국수인줄 알고 따라나섰는데 정작 식탁에 오른 국수가 완판 달랐다. 얇게 썬 소고기에 닭알 반쪼각을 얻어놓은 국수고명부터 신기했다. 나는 아버지가 알려주는대로 젓가락을 갈라쥐고 둬번 훠젓어 양념이 골고루 슴배이게한 다음 후럭후럭 소리내며 먹었다. 잠깐새 게눈 감추 듯 다 먹고 입을 쓱 문지르고나니 두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속의 열기를 확 밀어내는 세상 별미가 국수로구나 하는 커다란 감탄부호가 온가슴에 그들먹이 차올랐다.
동물중에 농사일을 돕는 동물을 말하라 하면 누구나 다 소라고 할 것이다. 소는 농사일을 돕는 고마운 짐승이며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는 동물이기도 하다. 소한테는 인내력과 성실함 그리고 근면한 정신이 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그처럼 소를 아끼고 사랑해왔으며 소를 기둥처럼 믿어왔을 것이다.
어릴 때 농촌에 살면서 소를 많이 보아왔는데 그후 도시로 와서 살면서 소라는 형상이 머리 속에서 많이 희미해짐을 느끼다가 올해는 신축년이라서 친구지간에 주고받는 덕담에도, 잡지에도 소에 관한 글을 자주 보게 되면서 문득 이전에 보아오던 소사랑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삼십대일 때 일이다. 그때 옆집에서 소를 기르고 있었다. 아들며느리와 한집에서 살고 있는 최아바이는 매일 새벽 일어나서 먼저 발길이 가는 곳이 바로 외양간이였다. 신새벽에 외양간을 말끔히 청소하고 비자루로 소등을 쓸어주고… 그러고 나서야 아침을 드셨다. 아침식사 후에 해도 되는 일인데 소똥냄새때문에 밥맛이 있었을가?
아버지는 생전에 나의 이름을'춘식'이라고 온전하게 불러준 적이 한번도 없었다. 언제나 마지막'식'자 하나만 따서 불렀는데 완연한 경상도 사투리로 음을 길게 빼며"식에~이~"하고 불렀다.
그 시절 나는 그 부름소리만 들려오면 아무리 재미난 놀이를 하다가도 뿌리치고 부리나케 달려가서 아버지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그러면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나를 어디든 데려가곤 했다.
우리4형제는 다'식'자 돌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형이나 동생을 부를 때는 이름 두자를 다 부르면서도 유독 나를 부를 때만은'식'자 하나만 썼다.
그래서 다들 아버지가"식에~이~"하고 부르면 나를 부르는줄 알았다.
현성 기관단위에 소환되여 사업하면서도 몇년간은 나의 촌바우같은 사업작풍이 불쑥불쑥 튀여 나오군 하였다.이를테면 회의를 열어도 지루하게 열지 않고 간단간단 요점만 강조하고 불필요한 형식은 버리고 빈말은 적게 하고 실제 일을 많이 하고 맡은 사업을 착실히 하는 사업 작풍을 강조했다. 하여 다른 부문의 동사자들로부터 촌바우라는 소리를 푸술히 들었다.
촌바우라는 별명을 가졌지만 사실 나에게는 여러가지 취미가 많았다. 남자라면 다면수가 되여야 한다는 것이 젊었을 때 내 인생의 신조였다. 어릴 적부터 독서를 가별히 좋아하고 청년시절부터는 글쓰기도 하고 구기운동을 포함하여 낚시와 스케이트, 롤러스케이트 등 운동을 즐겨했다. 물론 프로수준은 아니지만 어느 항목에서나 남보다 별로 뒤지지 않았다. 공사에서 문예경연대회를 할 때 만담을 하고 독창을 부르기도 했다.
7년 전, 나는 한가슴 꿈을 가득 안고서 조국의 꽃봉오리들을 양성하여 경제건설에 이바지하겠다는 결심을 다지며 귀국하였다. 낯선 곳에 가서 생활을 해야 하는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착잡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익숙하고 편한 것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생활에 도전하는 용기로 가슴 한구석에는 뿌듯한 기쁨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한국의 한 연구원에서의 계약기간이 만료되지 않았기에 귀국할 때 별도의 준비기간을 갖지 못해서 시간이 빠듯했다. 천진에 도착하자마자 이튿날부터 학교에 출근해서 대학교 교사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걱정은 하고 있었지만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생활인지라 처음부터 만만하지는 않았다.
사실 천진에 오게 된 것은 남편이 직장생활을 천진에서 하게 되어서인데 우리 둘 다 천진에 친척이나 친구가 한명도 없었다. 남편도 금방 천진에 오게 된지라 살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일단 경제호텔에서 며칠동안 투숙하였고 학교에서 너무 멀지 않은 곳에 집을 세맡아 주말을 리용해 이사짐을 옮겼다. 한국에서 부친 짐이 열 박스나 되었고 집 청소에 사야 할 물건도 가득했다. 남편은 택시를 타고 마트에 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들였고 나는 집에서 청소와 짐 정리를 했다. 이틀이 걸려서 대충 끝내고 나니 남편은 출장이란다. 전공이 건축업인 탓에 프로젝트 따라 움직여야 하는 특이한 직종을 가진 남편이다.
문득 이름 모를 못다 핀 한송이 연분홍색 꽃 앞에 가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름답지만 앙상하고 초라한 꽃이였다. 긴긴 어두운 밤과 외로움을 어떻게 혼자 달래며 지내왔을까? 왜 이런 척박한 곳에 피여났을까? 못다 핀 꽃 한송이 따뜻한 사랑 하나 없이 사람들의 중시도 받지 못한 채 피였다가 가을이 되면 하염없이 져버리겠지. 세상의 모든 꽃 하나하나에 그 잎새를 지켜주는 천사들이 있다고 하는데 너는 대체 누가 지켜주니? 워낙 척박한 곳이다 보니 나비와 벌조차 찾아오지 않았다. 거부할수 없이 태여나고 어쩔수 없이 홀로 자라는 꽃의 마음은 정녕 누가 리해해주랴? 긴긴날 보고 싶어도 못 보고 불러도 대답이 없는 막무가내 하는 심정은 얼마나 애타고 시렸을까? 그 뭔가를 찾고 기다리는 어설픈 미련과 기대감은 또한 어린 마음에 얼마나 많은 실망과 상처를 안겨주었을까?
문득 한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지나간6년, 내 마음은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거슬러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으러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