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옥 감독.
백열화되고 있는 북경동계올림픽경기를 시청하는 대중들은 중앙CCTV 해설자로 나선 양양(杨扬)의 활약상을 지켜보며 다시 한번 중국 첫 동계올림픽 금메달 수상의 희열을 안겨준 그의 선수시절을 떠올린다. 양양을 말하자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양양의 계몽스승인 조선족 김미옥(83세) 감독이다.
김미옥 감독은 전반에는 세계 경기장을 주름잡는 우수한 운동원이였고 후반에는 나라를 위해 세계 챔피언을 양성해낸 훌륭한 스승이였다. 1992년 그녀는 영예롭게 '전국우수운동원 세계챔피언 계몽감독상'을 수상했다.
'국가체육건장'의 영예를 획득한 빙상운동선수
60여년 전의 어느 추운 겨울날, 치치할조선족중학교의 스케이트장에서 목판스케이트를 신은 한 녀학생이 호기심을 가지고 서툴게 빙판 우를 달리고 있었다. 중학생이 되여서야 처음으로 접촉한 스케이트지만 련습을 하면 할 수록 애착이 가고 재미있었다. 그녀는 몇년 후 스케이트가 자신을 세계 각지로 데려가고 올림픽과도 인연을 맺게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김미옥 감독은 어릴 때부터 타고난 운동천부를 가졌는데 특히 달리기를 잘했다. 중학교 때에 치치할시중학생운동경기에서 400미터, 800미터 달리기 우승을 해 이름을 날렸다.
스피드스케이팅 운동원이였던 젊은 시절 김미옥 감독.
1954년, 김미옥 감독은 열다섯살 나이에 처음으로 스케이트를 접촉했지만 타고난 운동천부로 1년 후인 1955년 치치할빙설운동훈련반에 뽑혀갔다. 1960년 6월 흑룡강성스피드스케이팅팀에 운동선수로 뽑혀갔다. 당시 그녀와 함께 뽑혀간 선수로는 동양인으로서 세계 빙속 첫 금메달을 따낸 유명한 조선족 선수 라치환(81세)도 있었다.
타고난 운동자질과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성품을 지닌 그녀는 매일 열심히 훈련하고 애써 기술을 련마한 덕에 짧은 시간 내에 우수한 선수로 성장했다.
그녀는 전국적인 중요한 경기에 11차례 참가해 9차례 우승을 하고 11차례 2등을 획득했으며 6차례 전국 기록을 깨뜨렸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중국을 대표하여 3차례 국제경기에 참가해 500미터, 1000미터, 1500미터, 3000미터 전능 우승을 수상한 바 있으며 4차례 세계녀자스피드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 참가하여 1000미터 9등의 좋은 성적을 따냈다.
1962년, 그녀는 국가체육건장의 영예를 수여받았다.
세계 챔피언을 양성한 조선족 계몽스승의 혜안
김미옥 감독은 1962년말에 퇴역하여 선수생활을 그만두고 1963년부터 할빈시과외체육학교에서 운동원 지도교사로 근무하다가 1973년 성체육학교로 전근하여 선후로 스피드스케이팅, 쇼트트랙 선수를 양성하는 중임을 맡았다.
32년간의 감독 생애에 그녀가 양성해낸 학생들은 성체육학교 재학기간에만 성급, 전국 경기에서 250여차 상을 탔고 우승만 50여차례 하였다. 그들은 국내와 국제 경기 및 올림픽경기에서 우수한 성적을 따내며 중국의 빙상운동사업에 빛을 더해주었다. 1978년부터 1987년까지 흑룡강성 스피드스케이팅팀 녀성 선수들 중 김미옥 감독이 직접 선발하고 양성하여 수송한 운동원이 80%나 된다.
김미옥 감독이 양성해낸 유명한 선수로는 양양, 정춘양, 왕수옥, 장청, 장려, 김영순, 량림화, 장금평 등이 있는데 이 선수들은 국내와 국제 경기 및 올림픽 경기에서 수많은 우수한 성적을 따냈다.
그녀의 제자들 중 가장 유명한 선수가 바로 중국의 첫 동계올림픽 금메달 수상자인 양양(杨扬) 쇼트트랙 선수이다.
어린 양양 선수(오른쪽)를 훈련시키고 있는 김미옥 감독(중간).
1988년, 목단강시에서 열린 전성소년빙상운동경기에서 김미옥 감독은 양양을 자기 학생으로 점찍었다. 당시 13살밖에 안되는 양양은 어린 나이에 별로 그렇다할 성적도 없었고 체질 또한 약하여 늘 비염을 앓았으며 키도 1.44미터밖에 안되여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김미옥 감독은 다년간의 선수양성경험으로 양양의 남다른 우세를 보아냈다. 그녀는 양양이 총명하고 승벽심이 있고 운동기술을 잘 장악했으며 운동감각이 남다른 것을 보고 이 아이에게 상상도 안될 만큼 무한한 성장의 공간이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양양에게 큰 기대를 한 만큼 혹독한 훈련을 시킨 것은 아니였다. 김미옥 감독에게는 훈련에 관해 자신만의 독특한 규칙과 방법이 있었다. 그녀는 순리를 거스르는 훈련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린 선수들은 해마다 몸이 성장하고 근육과 힘이 자라며 성적도 늘기 때문에 그에 맞는 훈련을 점진적으로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속성방식으로 선수들의 성적을 향상시키려고 서두르면 오히려 반대결과를 가져온다며 매일 적당한 계획에 따라 규칙적으로 훈련을 시켰다. 그녀는 전신의 근육발달을 돕는 체조를 직접 만들어내 선수들의 체력을 길러주었다.
양양 선수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김미옥 감독(왼쪽).
1991년 4월, 김미옥 감독은 당시 15세밖에 안되는 양양을 데리고 전국선수권대회에 참가하러 북경으로 떠났다. 김미옥 감독은 양양에게 큰 압력을 가지지 말고 힘자라는대로 경기를 치르라고 격려하였다. 체질이 약한 양양은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감기에 걸려 주사를 맞는 신세가 되였다. 하지만 양양은 이를 악물고 박투한 끝에 전국 쇼트트랙 3000미터 경기에서 단연 금메달을 따냈다.
그후 김미옥 감독은 양양을 데리고 성2팀으로 조동되여 갔다. 양양의 잠재력에 더욱 큰 확신을 갖게 된 그녀는 그후부터 모든 훈련을 양양을 중심으로 기획해나갔다. 그뒤 양양은 1992년 1월 북경에서 열린 전국 쇼트트랙 선수권대회에서 1500미터, 3000미터 전능 우승을 따냈다. 양양은 1993년 여름에 국가 집중훈련팀에 들어가 훈련을 받았으며 1995년 스페인세계동계대학생운동회에서 300미터 계주 우승, 1995년 3월에 한국세계선수권경기에서 3000미터 계주 우승을 따냈으며 같은 해에 국가팀에 가입했다. 국가팀에 간 뒤에도 양양은 김미옥 스승에게서 받은 독립적인 훈련방식과 기술요령을 바탕으로 승승장구로 국제경기에서 여러차례 우승을 따냈다.
2002년 양양은 미국 솔트레이티시티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500미터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냄으로써 중국의 동계올림픽 사상 금메달 '0'의 기록을 깨뜨려 전국을 놀래우고 세계를 놀래웠다…
남편 정홍도, 딸 정춘양을 포함해 가족 모두가 빙설운동에 종사하는 김미옥 감독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젊은 시절 함께 빙상장에서 동고동락했던 국가팀 동료 라치환이 북경동계올림픽의 첫 성화봉송주자로, 기수로 참여하는 것을 보고 무한한 감동을 받았다며 중국의 운동원들이 분발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또한 북경동계올림픽 경기를 보러 가자고 제자 양양과 약속을 하였으나 코로나 때문에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특별취재팀 라춘봉 리인선 리수봉 윤선미 마국광 기자
사진 김미옥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