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지시조선족중학교에는 남녀로소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좋아하는 선생님 한분이 있다. 그분이 바로 근 30여년이라는 긴 시간을 교수 제일선에서 학생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보내온 윤학선 선생님이다.
윤선생님은 오로지 사람에 대한 진심어린 사랑과 사업에 대한 우직한 열정을 불태워왔다.
학창시절부터 달리기종목마다 학교기록 소유자로, 학교 축구선수로 활약해왔던 윤선생님은 체육에 대한 애호가 남달랐다.
그래서 1992년에 할빈체육학원을 졸업하고 모교에 돌아와 체육교원으로 되였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출근하는 첫날 그는 꼭 학생들한테 존경받는 선생님으로, 학생들의 성장의 길에 등불같은 존재가 되리라 다지고 또 다졌다.
윤선생님은 투박하지만 정이 많은 분이였다. 체육교원이라 말재주가 서툴었지만 학생들은 자기들에게 달리기요령이며 포환던지기 요령이며를 직접 시범하면서 몇번이고 싫은 기색 한번 내지 않고 끈질기게 배워주는 그의 태도에서, 뽈을 차고 나온 학생들이 덥다며 선뜻 호주머니 돈을 꺼내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모습에서 선생님의 정을 읽을 줄 알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윤선생님을 몹시 따랐으며 점심시간만 되면 사무실에 들려 윤선생님과 함께 얘기하기를 즐겼다.
98년도의 어느 하루 상지조중 축구팀이 시1중의 축구팀과 경기를 하던 도중 고중 2학년의 림모모학생이 다리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그때 윤선생님은 얼마나 급했던지 차를 부를 생각도 않고 바삐 다른 애들을 보고 림모모를 업혀달라 하고는 막 업고 뛰여갔다. 후에 학생들이 택시를 불러 타고 그를 쫓아갔을 때 그는 이미 백화점까지 뛰여간 상태였다. 체중이 거의 160근이나 되는 림모모를 업고 뛰여가느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옷이며 이마에 땀이 흥건한 선생님을 바라보며 학생들은 더없는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감동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였다. 림모모는 부모님들이 다 한국에 가고 숙사생활을 하는 친구라 약 보름정도는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이때 윤선생님은 두말없이 림모모를 자기 집에 데려가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사모님은 사골국을 끓여댔고 선생님은 퇴근하고 돌아오면 랭찜질을 해주군 했다. 두분의 지극정성에 예정보다 일찍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감동을 주는 일이 어찌 한두가지 뿐이랴? 축구를 하는 애들이라 거의 다혈질이라 쩍하면 친구들과 말다툼이나 주먹질을 하는 일이 잦았다. 그때마다 윤선생님은 꼭 자기 자식 타이르 듯이 차근차근 타일렀고 절대로 체벌같은 것을 멀리했다.
반주임과 트러블이 생겨 학교를 그만둔다고 집으로 내려갔던 애들을 얼리고 닥치고 해서 다시금 학교생활을 시작하게 했던 일, 윤선생님이 애들을 위하여 썩은 속은 정말 얼마인지 모른다.
그런데 웃사랑이 있어서일가? 아님 진심이 서로 통해서일가? 아님 그 애들이 비록 성질은 우락부락해도 정이 있어서일가? 그들은 선생님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늘 선생님과 련락을 주고 받으면서 계속 끈끈히 정을 이어나갔고 선생님의 생일이거나 무슨 좋은 일이 있으면 꼭 선물을 보내와 축하드리곤 했다. 선생님의 아들이 일본류학을 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자기들끼리 돈을 모아 큰 선물을 보내왔다. 이게 바로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이 있다는 것인 모양이다.
윤선생님의 사랑은 학생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였다. 윤선생님은 또 우리 학교선생님들속에서 “예쓰”선생님으로 불리우는데 그것은 우리가 누구나 도움이 필요해 윤선생님을 찾을 때마다 그는 한번도 “노우”한적이 없기때문이다.
선생님들의 집에 큰 대사가 있을 때마다 언제나 제일 먼저 달려가 자기일처럼 도와나서는 사람도 윤선생님이였고 제일 마지막까지 일을 봐주고 떠나가는 사람도 윤선생님이였다. 이처럼 선생님은 보살처럼 착하고 좋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였다.
그런데 성질 좋은 사람이 한번 성내면 무섭다고 윤선생님은 원칙을 지키는 일에서는 참으로 ‘두려운’ 선생님이였다. 2005년도 그가 체육조 조장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그때 체육조의 한 선생님이 체육시간에 아이들을 데리고 수업을 보지 않고 배구뽈과 축구뽈을 던져주고는 자기는 볼일 보러 간다고 나간 일이 있었다.
후에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윤선생님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당장 그 선생님을 불러서는 “이런 무책임한 행동이 어디 있냐? 교원이라는게 부끄럽지도 않냐? 학생들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보고 배우겠냐? 교원이라는 직업은 그 어느 직업보다도 책임감과 본보기를 요구하는 직업인데 어찌 자기 개인 일을 위해서 50명의 학생들을 그저 놀게 할 수 있냐”며 얼마나 호통을 쳤던지 그 선생님은 한시간동안이나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죽여줍시사 하고 손이야 발이야 빌었다 한다.
이처럼 윤선생님은 량심적인 교원이였고 늘 학생들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 애쓰는 그런 분이였다. 이러한 조장의 리더십때문이였을가? 상지조중 체육선생님들은 단합이 좋았고 어떻게든 학생들의 성장에 필요한 재능들을 길러주기 위해 애썼다.
그들은 날씨가 풀리면 륙상대훈련, 녀자배구대훈련, 남자축구대훈련을 지도하느라 늘 운동장에서 살았고 겨울철이면 스케트훈련을 시키느라 땀벌창이 되였다. 학생들에게 겨울철스케트장을 만들어주기 위해 며칠밤을 꼬박 새우면서 운동장에 물을 퍼부었고 눈이 올 때마다 스케트장의 눈을 쓸었으며 몇십컬레나 되던 학생들의 스케트를 하나하나 정성스레 갈아주었다.
이렇게 진정 학생들을 위해 내 한몸 내번지고 사업했기때문에 윤선생님은 여러번 상지시 선진인물로, 교육계통 선진공작자로 당선되였으며 또 할빈시 체육골간교사로도 당선되였다. 그리고 2005년도에는 후근 주임으로 발탁되였다.
그런데 윤선생님은 주임이라는 타이틀보다 일군이라는 타이틀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였다. 그는 늘 분무기통을 메고 학교정원의 꽃밭이나 풀밭에 약을 치군 했다. 윤선생님은 늘 사무실이 아니라 바깥에서 일군들과 함께 일을 하는 특수한 ‘교원’이였고 그의 사무실은 없는 도구가 없을 정도로 완전한 어느 작은 철공소나 가공소를 방불케 했다. 이런 장비들 대부분은 학교의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윤선생님 자신이 자체로 제작하고 수리한 것이다.
그렇게 후근주임을 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은지도 어언 10년, 중국대지에 축구열이 일면서 상지조중은 전국축구특색기지로 선정되였고 윤선생님은 후근주임을 계속 하면서 10년간이나 놓았던 교수를, 축구훈련대를 다시 책임지게 되였다. 이 학교의 체육교원들이 거의 한족선생님들이다보니 축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기때문이였다.
놓았던 교학을 다시 주어든다는 것이 말이 쉽지 반백을 넘긴 나이에, '장군배'도 어느정도 나온 터라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윤선생님은 말없이 총대를 다시 걸머쥐였다.
윤선생님은 참 '별난' 사람이였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이 나이에 학교의 립장을 고려해 총대를 메준 것만으로도 대단한거라 생각하면서 슬슬 교수임무나 완성하면 그만이련만 그는 젊은 교원들과 똑같이 하려 들었다. 오히려 젊은 교원들보다도 더 극성이였다. 그는 매번 자기의 체육시간이 되면 꼭 학생들보다 5분간 먼저 운동장에 도착해서 운동기재를 날랐고 아이들이 뛸때면 똑같이 뛰였다. 그리고 매번 공개교수가 있을 때면 남들은 뒤걸음치느라 바빴지만 선생님은 자진해서 임무를 맡았고 과제연구나 론문쓰기에도 열을 올렸다. 나이들어서 따낸 영예증서만 해도 젊은 사람들을 초과할 지경이다.
윤선생님이 다시 학교축구대를 맡았을 때였다. 처음 아이들을 접촉하던 그날 100메터 달리기며 꼴문대에 꼴넣기 등을 시험쳐보던 그는 애들이 말이 축구대지 체력이 형편없고 기본공도 형편없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우선 애들의 체력부터 올려야 하겠다고 생각한 그는 이튿날 아침부터 아침단련을 할테니 5섯시까지 학교정문앞에 모이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정작 이튿날 장소에 가보니 12명가운데서 온 사람이 5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왔다는 애들도 모두 정각 5시에 모인것이 아니였다. 그것도 그럴것이 예전에는 애들이 다 숙사생이라 아침단련을 조직하기도 좋았고 또 그때는 상대적으로 학생들이 순진하다보니 애들이 선생님들 말이면 잘 따라줬는데 지금의 애들은 다 제각기 개인집에 있는데다가 pc방이나 핸드폰 보는데 습관되여 있어서 운동같은 고달픈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기때문이였다.
하지만 애들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물러설 선생님이 아니였다. 며칠동안의 관찰 속에서 그는 고중일학년의 최모모라는 학생이 운동신경도 좋을뿐더러 학생들 속에서 위신이 높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애가 꽤나 의지력이 강하다는 것도 보아냈다. 그는 최모모를 축구팀 대장으로 임명하고는 그를 불러 밥을 사주면서 자기의 계획을 털어놓고는 최모모가 선생님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되길 원한다는 소망을 털어놓았다.
태여나서 난생 처음으로 자기를 그렇게 믿어주는 선생님을 바라보며, 또 그처럼 가식없이 진솔하게 자기의 생각을 털어놓는 선생님을 바라보며 그때 최모모는 감동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최모모의 도움으로 윤선생님은 아침단련훈련을 견지할 수 있었을뿐만아니라 차츰차츰 아이들을 자기의 품안에 끌어들였고 자기의 계획에 따라 훈련을 진행할 수 있었다. 축구대훈련을 시작한 후부터 그에게는 휴식시간이 별로 없었다. 낮에는 정상적인 학교의 수업을 조직해야 했고 또 7, 8교시면 축구팀 훈련을 진행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훈련이라는것이 딱 시간이 고정된 것이 아니여서 때로는 퇴근시간을 훌쩍 넘기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몸이 고달파도 애들이 잘 따라주고 또 하루가 다르게 진보해가는 애들의 모습을 보면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어 너무나 좋았다. 그런데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였다. 그가 가장 힘들었던건 같이 사업하는 반주임선생님들이 자기를 리해해주지 못하는 일이였다. 어떤 반주임선생님들은 자기네 반 공부가 괜찮은 애들이 축구가 좋아서 축구대에 들어가자 애들의 공부에 지장이 간다며 백방으로 방해를 했다.
그들은 먼저 애들을 찾아 담화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가장들에게 전화를 걸어 애를 축구대에서 뺄 것을 건의했다. 그바람에 애들이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립장이 곤난하게 되였다.
이 사실을 안 윤선생님은 먼저 애들에 대한 요구부터 엄격하게 했다. 그는 애들에게 “너네가 축구를 사랑해서 우리 축구대에 들어온 것은 환영한다. 하지만 만약 너네가 축구때문에 공부를 게을리 한다면 내가 먼저 너희들을 축구대에서 내보낼 것이다. 축구가 비록 즐거운 것이고 또 몸을 건강하게 할 수 있으며 남자다운 성격을 키울 수 있다는 장점은 있으나 필경 우리같은 농촌애들은 공부를 잘해서 대학교에 가야만 쉽게 운명을 개변시킬 수 있는만큼 나는 반주임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십분 리해가 간다”며 애들에게서 훈련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꼭 학습을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였다.
그리고 애들이 쓴 각서를 들고 반주임선생님들을 찾아가 하나하나 설득시켰다. 이렇게 윤선생님이 애쓴 보람으로 학생들은 마음놓고 훈련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상지조중 축구대는 상지시급시합에 나가기만 하면 일등을 했고 할빈시조선족학교축구경기에서도 여러번 일등을 따냈다. 그리고 2019년에는 전성축구경기에서 동메달을 땄다.
그외 여러 학생들이 축구특기생으로 혹은 체육전업으로 대학으로 진학한 학생들도 있다. 그리고 그 자신도 흑룡강성교육청으로부터 우수교련원 칭호를 수여받았다.
스마일즈의 “본보기는 무성의 가르침이고 가장 유력한 교육자이다”이라는 말을 실천으로 보여준 윤학선 선생님, 입이 아니라 자신의 두손으로, 두발로 사업을 해나갔고 아이들과 한덩어리가 되여 축구장에 자신의 청춘과 정열을 바치고 있다.
/김동파 기자 dongpa2000@163.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