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봉을 잡고 합창단을 열심히 지휘하고 있는 최만수 교수
음악의 '음' 자도 모르는 농사일만 4년 넘게 해오던 청년 최만수는 어느 날 논판에서 대대지부서기의 <공농병 학원 추천 입학통지서>를 전달받는다. 걱정과 설레임으로 가득 찬 마음을 안고 흑룡강성 송화강지구 5.7사범학교로 간 것은 1971년 봄이였다.
학교에 도착해 보니 학생은 고작 30여명, 선생님은 단 두 명뿐. 세 명이 번갈아 가며 쉴새 없이 밟아야 소리가 나는 낡은 발풍금 한 대, 게다가 툭하면 로동 또 로동… 렬악한 환경속에도 늘 열정이 가득하고 의지력이 강한 그는 타고 난 감각으로 음악을 빨리 익혔고 과제를 잘 완수하여 졸업 때에는 면시(免试)로 만점을 받았다.
실습과정을 마친 후 학교에 교직을 배정받았는데 같이 돌아온 네명의 동기들은 모두 중학교 교사로 순조롭게 배정이 되였으나 유독 그는 고향의 소학교로 분배받았다. 소학교로 가는게 싫어서 교육부에 중학교로 분배해 달라는 청원서를 넣은 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농사일을 시작한 그때가 1972년 6월이였다.
하늘이 도운 것일까, 3개월 후 산하조선족중학교 음악교사로 부임하라는 통지서를 받고 그는 바로 출근하였다. 인민교사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부푼 마음으로 수업을 시작했는데 악기라곤 발풍금밖에 배우지 못한 그는 처음으로 손풍금을 마주하게 되였다. 당연히 잘할리 없었기에 다른 교사들의 질타와 조소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타고난 부지런함과 끈기는 “한번 해보자!” 라는 의지와 열정에 불씨를 당겨 미친듯이 련습에 몰두했다. 스승도 교본도 없었다. 오로지 독학으로만 손풍금 련습을 하다보니 많은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끊임없는 노력 끝에 실력이 재빠르게 제고되였고 타고난 감각 덕분에 다른 악기들도 빠르게 습득했다. 1987년, 마침내 그는 ‘전국조선족소년아동예술절’에 출전해 손풍금 반주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을뿐만아니라 그가 작곡한 무용 『나도 날 수 있어요』가 창작 2등상을 수상하여 중앙TV에서 여섯 차례나 방송되였다.
만고끝에 성취감을 만끽한 그는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고 더욱 발전적인 음악세계를 추구하기 시작, 또 다른 꿈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연구에 매진하였다.
이때 불현듯 귀인의 도움으로 12년이나 몸 담았던 산하조선족중학교를 떠나 오상조선족초급중학교로 전근하게 되였고 1년도 채 안되여 다시 오상조선족고급중학교로 전근되였다. 대학입시가 중요한 고급중학교에는 음악수업이 많지 않아 오후 시간을 리용해 그동안 가슴속에 깊이 품고 있던 악대지휘자의 꿈을 펼쳐나가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같은 운동장을 사용중인 흑룡강성 소수민족학원인 오상조선족사범학교에서 전직 악대지휘자를 찾던 터라 인차 그를 채용하였고 이를 계기로 최만수선생님은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치게 되였다.
90년대 중반, 어느덧 나이는 오십대 문턱. 그동안 형편이 어려워 못했던 성악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한 그는 거주하던 보금자리 아파트를 처분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다. 가수가 되려는 목표보다는 성악공부를 하고자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더욱 체계적인 교육을 제공하고 노래를 하는 큰 딸의 뒤바라지 등 후학양성에 포인트를 맞추었다. 늘 독학으로 고군분투해 왔던 그에게 이 기회가 더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분초를 아끼며 기량을 닦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그동안의 노력이 좋은 결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1997년에는 자비로 오상시합창단을 설립하여 1년여 동안의 짧은 련습기간에도 불구하고 “홍콩, 오문회귀(回归)합창대회”에서 은메달 1등, 그리고 그가 창작한 4부 합창곡 『세계를 향해 묻노니, 중국을 아는가』가 작품 1등상을 수여받았으며 이 사적은 중앙문화부에 보고되였다.
다음 1998년, 『최만수 낭만곡』 음반이 발표됐다. 그후로 1999년 7월25일, 중앙인민방송국 민족부에서 『최만수 음악인생』 프로그램이 상하 2집으로 나뉘어 방송되였다. 또한 녀성 2중창 『웃음 절로, 춤 절로』를 필두로 50여 곡에 이르는 노래를 작곡하여 성급이상 간행물에 발표하였다.
같은 해, 흑룡강성농업개간전문대(农垦师专)에서 성악교수 및 합창지휘자로 채용하고자 최만수선생을 만나러 친히 방문한 인사처장을 향해 ‘사람을 잘못보고 온게 아니냐’ 는 질문을 할 정도로 최선생은 오로지 음악밖에 모르는 순수한 사람이였다. 정든 오상을 떠나 대학교로 전근하고 2년 후, 할빈사범대학교와 합병하게 되자 그는 당당하게 정식교수가 되는 꿈만 같은 일이 일어났다. 당시 대학교 음악학원 성악과 학생들은 대부분 중국민가(民歌)를 위주로 배우는데 전통음악과 이탈리아 벨칸토 창법을 익힌 그에게 민가는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원하는 일이라면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그는 틈 날때마다 도서관에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선후배 가리지 않고 스스럼없이 묻고 배우며 짧은 시간에 중국 56개 소수민족의 우수한 민요를 대부분 익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한편 합창지휘수업은 리론보다 실기에 치중할 수 있도록 과감하게 개혁하여 수업때마다 체육과를 비롯한 합창을 애호하는 남학생은 물론 남성 선생들까지도 자원적으로 참여하여 녀성이 많고 남성이 적은 합창의 애로점을 극복하는 등 큰 효과를 거두었다.
곡괭이 자루가 남긴 굳은 살. 그 거친 손으로 피아노 건반을 연주하던 그의 음악인생 38년. 특유의 락천적인 성품으로 역경속에서도 음악을 통해 대중들과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최선생에게도 정년 퇴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였다. 하지만 퇴직이라는 시원섭섭하면서도 미묘한 심경을 추스를 여유도 없이 할빈시 음악입시 양산지인 즉흥음악학원의 요청으로 성악지도를 하게 되였고 할빈시 철도국 합창단 등 여러 합창단의 초청을 받아 지휘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으며 2017년에는 흑룡강성을 대표하여 ‘오상시 산하1중학교 관악단’을 이끌고 ‘제1차 대련국제관악제’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뿐만아니라 그의 명성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자 여러 지역의 성악학생들이 몰려들어 인생에 있어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최선생은 무보수에도 마다하지 않고 그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여러 로년합창단을 지도하며 오늘도 “하면 된다”는 일념으로 로장의 투혼을 불태우고 있다.
/본지종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