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군대삼촌이 있다.”
소학교에 다니던 시절 나에게 가장 큰 자랑이 있었다면 군대에 다니는 6째 삼촌이였다. 군복을 입은 멋진 모습만이 아니다. 그때는 군대라고 하면 아이들에게는 가장 큰 신망의 대상이였다.
일년에 한두번이나 볼까 말까한 영화를 보아도 항일전쟁 영화였고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그림책들도 철도유격대나 안새유격대와 같은 그런 것이였으니 군대란 이름만큼은 누구도 넘보지 못할 그런 무한의 위력을 갖고 있었다.
군대라고 해야 어쩌다가 한번 마을을 지나가는 군인의 모습을 보는 것이 전부였던 그 시절, 내 삼촌이 군인이고 마을에서도 유일한 군인가족이란 것보다 큰 자랑은 없었다.
학교에서 부모가 교원인 아이들보다도 ‘군대삼촌’이 있는 내가 더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었던 그 리유이기도 하다.
군대삼촌이 어쩌다가 휴가를 나오면 그때만큼 신나는 일이 없었다.
삼촌은 군복을 입고 학교 대문이 아니라 학교 출입문 앞에서 나를 기다려줘야 했다. 어쩌다가 청소당번이라도 되여 내가 늦어지는 날이면 학교에는 애들이 몇명 없었지만 그래도 군대삼촌과 함께 귀가하였다. 기어이 삼촌과 투정을 부리면서 시간을 끌어 다른 아이들에게 군복을 입은 군대삼촌을 보여야 직성이 풀렸던 것이다.
일요일에 휴식하는 날에도 군대삼촌은 내 손목을 잡고 학교운동장을 서성거려야 했다. 아이들에게 내게 군대삼촌이 있다는 것을 말로 아니라 직접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일요일라고 해야 남자애들 몇이 뽈이나 차면 그것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꼭 군대삼촌과 함께 학교를 한번은 다녀와야 직성이 풀렸다.
음력설이 되면 우리 집 처마밑에는 큼직한 빨간 꽃이 걸려 있었다. 군인 가족이라고 진무장부에서 우리집에 꽃을 달아주고 가면 그 꽃이 색 바래는 날까지 아이들에게 핑계들을 만들어서 집으로 데리고 와 구경을 시켰었다.
군대삼촌은 내 어린시절의 가장 즐거운 추억의 보금자리다.
“나에게 군대삼촌이 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서도 내 자랑은 군대삼촌이였다. 군대삼촌과 함께 보내는 그 순간순간들은 여전히 어린 시절의 그 모습을 잃지 않고 있었다.
군복을 벗고 일반인으로 돌아왔어도 군대삼촌은 군인다운 성격과 생활습관을 갖고 있었다. 무엇을 하나 절도가 있고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삼촌, 군대삼촌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사회에서 내가 살아가야 할 내 모습과 만나고 있었다.
어른이 되였노라고 남자를 사귀게 되였을 때에도 아마 내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군대삼촌 이야기였을 것이다. 더이상 누구의 흠모를 받는 그런 군대의 형상은 아니었지만 내 마음에 1번지가 군대삼촌이란 것을 지금의 남편에게도 그렇게 각인시킨 것은 아니였을가?
“나에게 군대삼촌이 있다.”
이젠 아들도 훌쩍 커서 고중에 다니고 있지만 그런 아들에게 “너의 여섯째 삼촌할아버지가 군대였다”는 말보다는 내 군대삼촌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미 입만이 아닌 마음에 굳어져 있다.
내가 어른이 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는 사이에 군대삼촌도 이미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 독립했지만 나이와는 무관하게 군대의 그 형상은 변함이 없었다.
어른이 되여서야 내가 소학교에 다닐 때 군대삼촌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도 내가 하학할 시간이 되면 그대로 뿌리치고 내 마중을 다녔음을 알게 되었었다. 어린 아이의 알량한 자존심과 허영심이었지만 군대삼촌이 내게 주었던 것은 그런 허영심이나 자존심 아니였었다. 어쩌면 어린 나이에 그런데 빠지는 내게 바른 삶의 자세를 가르쳐준 것은 아니였을가?
“군대는 이러면 안되거든. 넌 군대삼촌의 조카니깐.”
내가 무엇을 잘못하면 군대삼촌은 군인답게 군대규률을 말하면서 내 잘못을 지적해주었었다.
“군대는 임무를 목숨처럼 지켜야 해. 그러니 학생의 임무는 숙제인데 숙제를 하지 않는다면 그건 군대삼촌이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닐가?”
어쩌다가 놀음에 빠져서 숙제를 바로 하지 않으려고 하는 날이면 군대삼촌이 내게 하셨던 말씀이다.
군대 규률.
군대삼촌에게서 배운 그런 군대규률이란 내가 사회에 나와서도 살아가면서 타인에게 베풀고 나누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그런 규률이 되기도 했었다.
“나에게 군대삼촌이 있다.”
이젠 군대삼촌이 내 곁을 떠나 돌아오지 못할 세상으로 떠나신지도 한참은 된다. 하지만 나의 말투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고인이 되신 삼촌이라면 “나에게는 군대삼촌이 있었다”로 바꿔야 하지만 군대삼촌은 몸은 떠나도 내 마음을 떠나지 않고 있다.
56세의 젊은 나이에 암이란 그 벽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건 세상 사람들에게 군대삼촌이 떠난 것이지 내 마음의 빈자리를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다.
군대삼촌의 모습만이 아닌, 군대삼촌다운 그 삶의 가르침만이 아닌 가족이란 의미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마음에 빈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였음을 군대삼촌을 통해서 깨닫게 되였다.
누군가가 떠나면 집에서의 빈자리가 금방 표가 나고 사회에서도 그 빈자리로 남게 되지만 가족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에는 누가 떠나건 그것이 빈자리가 아닌 그의 자리로 남게 되는 것이 아닐가?
“나에게 군대삼촌이 있다.”
오늘도 나는 속삭인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폼잡기 위함도 아닌 내 자신에게 속삭여준다. 그러면서 이젠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절, 돌아오지 않을 군대삼촌이 내 마음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