련애할 땐 련인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단점이 거의 안 보이거나 있어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마음도 척척 맞아‘이심전심’이 이런 거구나 한다. 막상 결혼 생활을 시작하면 어떨가?
그들이 만난 곳은 독서 토론회였다. 그는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철학과 예술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고1년에100권 이상의 책을 탐독했다.
그녀는 미술을 전공했고 인문사회학에 관심이 많았다.
독서 토론회에서 둘은 불꽃 튀는 론쟁을 벌였다. 관계는 자연스레 련인으로 발전했다. 그동안 만난 어떤 녀자보다 그녀는 그의 련애관에 잘 맞는 상대였다. 그녀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련애였다. 지성과 교양이 대화를 압도했고 차잔을 앞에 놓고 벌이는 토론은 서로의 정신 세계를 나날이 고양시켰다.
사랑의 높이도 더불어 함께 올라갔다. 그들은 사랑하며 존중했고 나아가 서로를 존경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서로 결혼해야 할 운명이라고 동시에 생각했다. 그는 그녀에게 프로포즈했고 당연히 그녀도 받아들였다.
결혼을 앞두고 미래의 청사진을 그렸다. 함께 어떤 책을 읽고, 어떤 DVD를 사고, 주말에는 어떤 전시회를 보고… 이런 정신적 계획이 주였다. 주변에서는 그들의 결혼 생활은 분명히 남들과는 다를 거라며 진심 어린 축복을 아끼지 않았다. 생활 속의 아귀다툼 따위는 남 말이고 동지적 관계에 기반한 모범적 사례가 될 것임을 그들도 주변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명한 철학자의 주례로 결혼식을 마쳤고 쿠바로 신혼려행을 떠났다. 체게바라의 숨결을 느끼고‘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에 나오는 바로 그 멜로디와 리듬을 만끽하는 그들의 려행길에 고된 일정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신혼집의 방 하나에는 책이 빼곡히 들어찼고 또 하나의 방은 DVD와 음반으로 가득 찼다. 거실의 벽에는 그녀가 그린 그림이 아름답게 배치되여 있었다. 저녁이 되면 둘만의 보금자리에서 련애 시절과 다를 바 없는 대화를 나누며 함께 예술 영화를 감상하는 나날이였다.
시간이 흘러 신혼이라 부를 수 없는 때가 왔다. 그들의 다툼은 이제 더 이상 철학과 예술이 아니였다. 양말을 뒤집어서 세탁기에 넣느냐 마느냐, 속옷을 손빨래하느냐 마느냐, 치약을 끝에서 짜느냐 가운데서 짜느냐 하는 자잘한 것들이 문제였다. 그녀는 임신과 출산을 겪었다. 그는 더 이상 집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
오직 동요와 클래식이 그가 듣는 음악의 전부였으며 거실에서는 하루 종일‘뽀롱뽀롱 뽀로로’가 상영됐다. 책이라도 읽으려고 하면 애와 안 놀아주고 뭐하느냐는 안해의 타박이 이어졌다. 그와 그녀가 꿈꾸던 리상적 결혼 생활 따위는 머나먼 우주로 실종되고 없었다. 그게 그들의 결혼 생활이였다. 남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결혼은 생활의 연장이지 련애의 연장이 아니라는 것, 어떤 책도 알려 주지 않았던 깨달음을 그와 그녀는 생활을 통해서야 알았던 것이다.
결혼 전에 사랑을 할 때는 감정이 가장 강렬하며 자신의 감정에 가장 충실한 시기이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꿈, 생각과 감정을 의식하지 않는 순간이 단1초도 없었다. 결혼 전의 사랑은 누가 뭐라고 해도 역시 대부분 자기도취적이다.
그러나 결혼에는 토요일 밤의 기분뿐만 아니라 월요일 아침의 느낌도 포함되며 다른 날들의 기분도 포함 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느끼는 즐거움 외에 함께 노력해서 얻은 즐거움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그들만의 랑만적언 세계에 파묻혀 있을 수 없으며 서로의 가족과 친구와 동료들과 련관되여 살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사랑은 많은 단계를 거친다. 따라서 그때마다 자연히 불완전함을 로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완벽함을 단념하고 인간의 결함 속에 깃든 아름다움을 깨달을 때 결혼으로 인해 맺어질 사랑은 더 완벽해 질지도 모른다.
/강희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