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식을 슬하에 여섯이나 두었다. 지난세기5,6십년대 그리고 쭉 이어서70년대까지는 계획경제시대라 농촌에서 생활하려면 로동력이 많아야 공수를 많이 벌수 있었고 그 공수에 따라 년말에 가서 리윤을 분배받아 현금을 만져볼 수 있었다.
우리집같은 경우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누님이 로동력이고 둘째누님, 큰형님은 고중에, 셋째누님과 둘째형님은 중학교에, 막내인 나는 초등학교에 다니다나니 항상 생활에 쪼들려야 했다. 게다가 할머니까지 우리집에 계셨고 어머니는 장기환자라 생산대에 나가 일하는 시간보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집에 누워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어느 겨울날 음력설을 며칠 앞두고 생산대에 회의를 갔던 큰누님이 돌아와서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였다. 공산당원이였고 무쇠처녀라 일할라치면 누구에게도 지지않는 큰누님였지만 일년내내 일하고도 리윤 분배는커녕 우리 가족이 한해 먹을 식량에 여러가지 비용을 제하고나니 빚을 지게 되였다면서 눈물을 펑펑 흘렸다. 그러면서 설을 쇠라고 생산대에서 주었다면서 구제금50원을 내놓았다. 큰누님 자존심에 일년 내내 뼈빠지게 일하고 구제금을 타오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고 마음이 아팠겠는가. 어린 내 마음에도 언제면 우리 집에도 잘 살 날이 올가 하는 막연한 기다림이 시작되였다.
해마다 가을철이 되면 어머니는 로동력이 많고 그나마 자식들이 적은 집들에 염치를 불구하고 다니면서 열근, 스무근씩 쌀을 꾸어다가 자식들을 굶기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쓰셨다. 지금은 생활수준이 좋아져서 일부러 밥에 잡곡을 많이 섞어서 먹고 있지만 그때 우리집의 밥을 보면 옥수수, 수수, 좁쌀, 기장까지 섞어서 말이 밥이지 흰쌀이 별로 없었다. 년말이 되여 식량을 분배할 때도 로동력과 비로동력을 구분해서 식량을 나눠주었는데 우리집같은 경우 입쌀밥만 먹으려면 택부족이였다. 우리 형제들 모두가 한창 먹을 때라 입쌀을 가지고 다른 잡곡을 바꾸어 먹으면 그나마 배는 곯지 않을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만 해도 한족들은 수전농사를 잘 지을줄 몰라 입쌀 한근을 가지고 옥수수나 수수를 댓근씩이나 바꿀수 있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였다.
나 또한60년대 말에 태여나 우의 누님이나 형님들보다는 배는 덜 곯았지만 잡곡밥은 정말 많이 먹어봤다. 왜 그때는 그렇게 먹기 싫던지. 입안에 넣으면 찰기가 없어 빌빌 돌아가는 잡곡밥, 지금은 밥을 할 때마다 건강식품이라 생각하고 잡곡을 한웅큼 집어넣어야 직성이 풀린다. 이렇게 세월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제 갈길을 가고 있었나보다.
70년대 말, 도시나 농촌에도 훈훈한 개혁의 봄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우리 가정에도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어려운 가정에서 유독 둘째형님만은 다른 형제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 같다. 지금도 가금씩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어린 형님의 가슴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잘살아 보겠다는 결심이 그 때부터 서지 않있는가 생각이 든다. 특히 중학교를 다니면서 일요일이나 방학 때마다 자전거에 채소와 꽈배기, 만두 등을 싣고 농촌마을에 다니면서 장사를 시작했다. 고중을 졸업하고 촌의 부기원으로 일하면서 외국의 살초제를 들여다가 전촌은 물론 이웃촌에까지 팔아 목돈을 쥐기도 했다.
농춘의 호도거리 책임제와 더불어 개인들에게도 장사를 할수 있는 정책이 서서히 펼쳐지면서 둘째형님은 남보다 늘 앞섰다. 한평생 분배받은 제한된 논농사를 지어봤자 먹고 입는 문제는 해결할수는 있겠지만 많은 돈을 벌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우선 현성안의 시장가안의20여 평방미터되는 집을 세맡고 조선족충미개장집을 꾸리기 시작했다. 형수님과 손을 맞추어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고생에 고생을 하면서 종자돈을 만들었다. 비록 규모가 작은 장사였고 사회의 어중이 떠중이들의 소란도 끊기지 않았지만 이리저리 요행 잘 헤쳐나갔다.
그렇게 개장집을 꾸려오다가5년만인가 어느날 형님은 담대한 결정을 내렸다. 현성 중심가에200여평방미터 되는 세집을 맡고 내부장식에 달라 붙었다. 개장집의 장사도 하면서 인테리어 장식을 할려니 한몸을 쪼개써야 할 정도로 바빠지만 그래도 사는 멋이 있다고 부지런히 뛰였다. 힘들어도 돈을 벌수 있다면, 잘 살수 있다면 무슨 고생인들 이겨내지 못하랴는 것이 그때 둘째형님의 삶의 신조라 해야 겠다.
형님의 예측은 빚나가지 않았다.'중한판점'을 개장해서3년이 지난1994년에는 어벌차게 그 당시로 말하면 목돈이라 할수 있는16만원을 들여 농부산물시장가와100여미터 상거한 거리에 있는400여평되는 건물과 집터주위까지 사들였다. 단층집을 개조하여 대청은30여개 상을 놓을수 있는 홀로 만들고 사들인 집터에다는 새로 집을 이어지어 노래방까지 꾸려놓았다. 하여 술을 마시고 먼곳에 옮기지 않고 집접 노래방까지 행할수 있는 우세로 많은 손님을 끌었다. 이렇게 몇년간 장사가 호황이던 것을 멈추고 또 어벌차게 단층집 건물을 허물고2000여평이 되는5층건물을 일떠세우는 장거를 보였다. 그것이2002년, 어쩌면 그 때는 모든 일들이 술술 풀렸다고 해도 거짓말이 아니다. 단층집으로부터5층건물이 일어 나기까지 얼마마한 고생을 했는지는 그 자신을 내놓고 누구도 모르리라.
1층은 상가로,2층은 결혼식장으로,3층은 단칸방으로,4층은 호텔방으로 꾸려서 한곳에서 먹고 놀고 휴식할 수 있는 휴식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그 때는 음식서비스업이 정말 호황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쭉10여년간 이어오다가2012년부터는 둘째형님은 업종을 바꾸어 기존의 자원을 충분하게 리용해서 로년아파트로 개조하고 대외로 세를 놓기 시작했다. 그 예측이 또 한번 맞아 떨어졌다. 아파트 위치가 현성의 중심거리와 멀지않고 또 시장과 상가들이 즐비한 곳에 위치해 있다나니 대뜸 인기를 끌었다. 많은 세입자들이1년이상 세를 맞는가하면 한두달 입주해 있다 나가면 인차 새로운 입주가가 들어 오군 했다.
금년에는 할빈으로 진출해서 도리구 학부4도가 대학가를 상대로'인천 아저씨'라는 간판을 내걸고 한국맛 패스트푸트 음식점을 오픈 했다. 지난날 가난의 된맛을 맞본 당사자로써 둘째형님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라의 개혁개방정책으로 하여금 지금은 돈많은 다른 부자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여유롭게 생활하고 있다. 돈을 번후 항상 가난했을 때 도움을 주었던 고향 사람들과 고향을 위해서 서슴없이 목돈을 기부하는가 하면 전에 있었던 조선족들의 운동회, 학교행사는 물론 빈곤 대학생 돕기, 빈곤호돕기 등 여러가지 사회활동에 적극 참가했으며9기,10기 현정치협상회의 위원, 상무위원은 물론 금년에는 현화교련합회 부주석이라는 중임을 맡고 있다.
둘째형님은 늘"돈을 벌줄고 알아야 하지만 돈을 쓸줄도 알아야 한다"며 벌어온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을 아주 즐겁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 돈을 어떻게 버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 돈을 어떻게 유용가치가 있게 쓰는가 하는것 역시 우리가 살아가면서 언제나 마음 속에 깊이 세겨야 할 일인것 같다. 그 누구나를 막론하고 어렸을 때 고생이 나중에 달콤한 열매로 맺히기까지 좌절도, 눈물도, 실패에 실패를 거듭 하면서 끝내 성공의 희열을 맞볼 때, 가장 달콤하지 않을가 생각 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가 어렸을 때 겪었던 고생과 어려움이 우리가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계기로도 될수 있고 삶의 질 제고 나아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밑거름과 초석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초년 고생은 돈을 주고도 못산다'는 속담이 나왔는가 보다.
둘째형님의'성공담'을 부끄럼을 무릅쓰고 자랑하면서 나라의40년 개혁개방정책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윤택하게 해주었는가 하는 고마움이 진정 가슴깊이 느낄수 있게 하는 순간이였다. 자기 능력껏, 재간껏 벌면 누구라도 부자가 될수 있는 세월이 좋다고 날마다 흥타령이라도 불러야 하는 심정이다. 가난했던 지난날 가난을 탈피하기 위해 꾸었던 꿈의 씨앗은 쓰고 떫었겠지만 그 꿈의 실현을 위해 들인 노력과 성공의 열매는 너무 향긋하고 달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