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연길랭면을 먹어본 것은 지난70년도였다.3월달 초봄날씨치고 매서운 꽃샘추위에 온몸이 으스스 떨리던 어느날 점심무렵, 출근했던 아버지가 문뜩 집에 들어서며 국수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나는 엄마가 평소에 만들어주는 강냉이국수인줄 알고 따라나섰는데 정작 식탁에 오른 국수가 완판 달랐다. 얇게 썬 소고기에 닭알 반쪼각을 얻어놓은 국수고명부터 신기했다. 나는 아버지가 알려주는대로 젓가락을 갈라쥐고 둬번 훠젓어 양념이 골고루 슴배이게한 다음 후럭후럭 소리내며 먹었다. 잠깐새 게눈 감추 듯 다 먹고 입을 쓱 문지르고나니 두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속의 열기를 확 밀어내는 세상 별미가 국수로구나 하는 커다란 감탄부호가 온가슴에 그들먹이 차올랐다.
그후로부터 아버지를 따라 농촌에 내려갔고 중학교를 졸업해서는 또 농촌 집체호 생활에 들볶이다나니 한번도 국수추렴을 못했다. 하지만 구수하고 시원한 육수생각이 속이 썰썰할 때마다 불쑥 올리밀면서 가뜩이나 여위어 홀쭉한 배가죽을 안스럽게 후치질했다. 더우기 조밭과 콩밭 기음철이면 밭고랑은 아득하게 긴데 풀이 꽉 차서 일축이 안 났고 화끈거리는 땅 속의 열기와 이마며 등골에서 떨어는 땀방울은 얼마나 사람을 괴롭혔던지 스스로 열을 받아 털썩 주저앉는 일이 많았다. 그러면 눈앞에 어느덧 시원한 랭면그릇이 영화필림처럼 빙글빙글 돌아간다. 겨불내 물씬 풍기는 입김을 스르르 감도는 군침에 휘감아 가까스로 힘들게 꿀꺽 삼킨다. 마치 남들이 내 앞의 랭면그릇을 나꿔챌 것 같아서말이다. 맛 들인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없을 때 본능의 욕구를 억지로 참아야 하는 괴로움은 눈물보다 더 짠 슬픔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랭면을 먹을 기회가 차려졌다. 생산대장이 나더러 몇사람과 함께 연길역에 가서 황연탄을 실어오라는 것이였다. 나는 날 듯이 기뻤다. 소수레를 몰고 연길시내 복판에 들어서자니 처음엔 점직한 생각이 들었으나 정작 달구지에 석탄을 퍼담아싣고 복무청사 랭면집을 향할 때에는 나의 심정이 오히려 명절기분처럼 붕 떠있었다. 세상의 만복을 독차지한 것 같아 여럿이 음식상에 빙 둘러앉아 싱글벙글했다. 처음으로 큰 사발로 부어올린 생맥주를 쭉 들이켜고 나는 부랴부랴 국수그릇을 끄당겨놓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꼭 몇해만인가, 오매불망 그립고 또 그립던 연길랭면을 생각같아서 단숨에 후루룩 한입에 넣었으면 좋으련만 어쩐지 아까워서 젓가락으로 면발을 길게 쭉 늘여붙였다가 간신히 입안에 넣고 천천히 음미했다. 쫄깃쫄깃하며 매끄럽고 전신의 갈증을 확-걷어내는 시원한 그 맛이 꼭 아버지가 사주던 그날의 국수맛이였다. 고무줄처럼 늘어날지언정 끊기지 않는 특성을 곁에서 누군가"운동장 세고패 돌 탄력이다"고 롱담을 해서 웃음보를 터뜨렸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맛나는 음식을 만포식하니 기분이 유난히 좋아 백양나무 량켠에 쭉 늘어선 귀로가 더없이 넓어보였다.
연길랭면이 걸어온 력사도 인젠60년이다. 값은 옛날의20전에서50전,10원,20원으로 올리뛰여도 고급 육질과 중약재를 곁들어우려낸 맛과 향은 생활의 만족감을 한층 높여주어 인젠 기뻐도 국수요, 슬퍼도 국수를 찾는 습관이 조선족뿐만 아닌 한족들에게도 널리 보급되여 매일 문전성시를 이룬다.
작년에 상해, 항주, 소주를 돌면서 한족들과 접촉했는데 내가 연길에서 왔다고하니 만나는 사람마다"연길랭면이 참 좋아요"였다. 그리고 서울, 평양에서 온 손님들을 연길랭면집에 모시고 가"맛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더니"진짜 좋습니다!""아주 훌륭합니다!"라고 말하며 모두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극찬했다. 나는 마치 자신의 료리솜씨가 최고급의 긍정을 받기라도 한 듯 어깨가 으쓱해지며 긍지감을 느꼈다. 편벽한 산간도시라 항상 내세울 것이 없어 느끼던 위축감을 털어내고 자존심이 번쩍 고개를 쳐든 고향사람들의 희열이였다.
중국대륙의10대 브랜드 국수로 떠오른 연길랭면이 독특한 민족의 맛을 지구촌의 항행선을 따라 백년을 넘어 천년을 이어갈 자랑찬 실력을 아로새겨본다.
"무더위에 시원한 국수 한그릇 맛볼가?"
나의 마음은 벌써 연길랭면집에 가서 앉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