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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정겨운 부름소리 - 김춘식

2021-12-12 15:07:16

稿件详情 내가 한국땅을 밟은지 얼마 안되여서였다. 어느 저녁무렵, 할일없이 대문앞을 서성거리고 있는데 주인집 젊은이가 골목에서 경상도 특유의 악센트로"화아~야~!화아~야~!"하고 큰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그러자 예닐곱살 계집애가"예~ 아빠"하며 집에서 쪼르르 달려 나오더니 제 아버지한테 살짝 매달렸다. 애 아버지는 귀여운 듯 그런 딸애의 머리를 살짝 도닥여주더니 웃으며 가방에서 무엇인가 꺼내주었다.

순간 이름이'화'인 아이의 입에서 탄성이 괴여올랐다. 

"토끼! 야~ 이쁘다아~"

이튿날 저녁도 젊은이는 대문에서부터 큰소리로"화아~야~""화아~야~"하고 딸을 불렀는데 그러자'화'는 여전히"예~아빠~"하며 쪼르르 달려나가는 것이였다. 

순간 나의 귀전에"식에~이~"하는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내 어린 시절 늘 듣던 아버지의 정겨운 목소리였다.

아버지는 생전에 나의 이름을'춘식'이라고 온전하게 불러준 적이 한번도 없었다. 언제나 마지막'식'자 하나만 따서 불렀는데 완연한 경상도 사투리로 음을 길게 빼며"식에~이~"하고 불렀다.

그 시절 나는 그 부름소리만 들려오면 아무리 재미난 놀이를 하다가도 뿌리치고 부리나케 달려가서 아버지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그러면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나를 어디든 데려가곤 했다.

우리4형제는 다'식'자 돌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형이나 동생을 부를 때는 이름 두자를 다 부르면서도 유독 나를 부를 때만은'식'자 하나만 썼다.

그래서 다들 아버지가"식에~이~"하고 부르면 나를 부르는줄 알았다.

나는 어릴 때 아버지의 그 정겨운 부름소리를 몹시 즐겼다.

아버진 때로 그 부름소리를 듣고 달려간 나를 형제들 몰래 헛간으로 데리고 가서 당신이 잡숫지 않고 남겨놓은 맛있는 것들을 나의 호주머니에 쑤셔 넣어주기도 했다.

아버지의 이 부름소리는 집 뜰에서, 동네 골목길에서, 학교 정문앞에서, 마을뒤 시내가에서, 겨울저녁 탈곡장에서도 울려 퍼졌다.

아버지는 가끔 온 동네를 휘저으며 나를 찾아 다니기도 했다. 그만큼 나 또한 시도 때도 장소도 가리지 않고 집밖에 나가 놀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소학교3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이 부름소리도 듣기 싫어졌다. 심지어는 그 부름소리를 다른 애들이 들을가봐 두려워했다.

다 큰애를 여적 코흘리개처럼 부르는 것이 남 듣기 창피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동네의 일부 못난 자식들이 불구인 아버지가 다리 저는 모양을 흉내내며"식에~이~"하고 놀리기 때문이였다.

처음에는 좀 그러다 말겠지 하고 꾹 참았지만 내가 참을 수록 애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놀려댔다.

나도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모욕이기때문이였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렇게 놀리기만 하면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들어 싸웠다.

한번은 하교 후 학교 정문을 나서는데 나보다 두어살이나 어린 금룡이가 멀리서 다리 저는 흉내를 내며"식에~이~"하고 나를 불렀다.

어린애에게까지 조롱을 당한 나는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치밀어올라 다짜고짜 금룡이한테 달려가 주먹으로 가슴을 내질렀다.

그리고도 성이 차지 않아 찔찔 우는 그 애를 땅바닥에 매쳐 놓았다.

그리고 해가 지도록 학교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옆집 애가 와서 아버지가 나를 찾는다고 했다. 다른 때 같으면"식에~이~" 하고 나를 찾으러 학교까지 왔을 아버지인데…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니 아버지가 손에 회초리를 쥔 채 사립문앞에 서있고 그 곁에는 금룡이 어머니가 있었다.

그제야 나는 아버지가 왜 나를 부르며 찾으러 오지 않았는지 알아차렸다.

아버지는 눈을 부릅뜨고"이 자석, 왜 이 집 애 때렸노? 너도 좀 맞아봐라"라고 하더니 다짜고짜 회초리를 추켜들었다.

아버지는 누구든 자식들이 싸운 일로 찾아오면 우리의 변명은 들으려 하지 않고 우리를 꾸짖고 때렸다. 어쨌든 남을 때린 건 잘못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날만은 나도 억울한 매를 맞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회초리를 피하며 큰소리로"그게 내 잘못이야? 다 아버지 탓이지"라고 대꾸했다.

아버지는 회초리를 치켜든 채"이 자석 뭐라카노? 왜 내 탓이라카노?"하고 따졌다. 나는 아버지의 손에 든 회초리를 멀찌감치 피해 서서 낮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리고는"누가 아버지보고 내 이름을 그렇게 부르래? 그러니 애들이 자꾸 놀리지"하고 되레 아버지를 나무랐다.

"이 자석아 그렇다고 싸우면 되나?"

아버지는 이렇게 나를 나무라며 들었던 회초리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아까부터 내 변명을 들으며 안절부절 못하던 금룡이 어머니가"아주버니, 미안해요. 다 내 새끼 잘못이예요. 애가 버르장머리없이 어른들 흉내를 내다니.내 집에 가서 단단히 혼내야지." 하고는 씩씩거리며 돌아갔다.

아버지는 그 후에도 계속 나를 그렇게 불렀고 나는 계속 애들에게 놀림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런 부름소리도 초등학교 졸업할 즈음부터는 점점 뜸해졌다. 아버지도 성장한 아들의 체면을 지켜주려 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나를"춘식아"라고 부르는 것도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식에~이~"라는 이름이 이미 입에 굳어서 달리 부를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열다섯살 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가실 때까지 그랬다.

어려서는 미처 몰랐던 아버지의 사랑표현 방식을 나는 썩 후에야 알았다.

어른들이 이름을 마지막 자 하나만을 부를 때 거기에는 다함없는 사랑이 깃들어진 것임을...

고향이 울산인 아버지는 살아 생전에 그토록 고향을 되뇌였지만 끝내 고향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중국에서 돌아가셨다.

하지만 세상을 뜨실 때까지 경상도 말투만은 변함없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고국에서는 물론 여기 중국에서도 경상도 말투를 들으면 가끔 아버지의 말씀들이 귀가에 울린다.

지금 이 시각도 그"식에~이~"라고 했던 아버지의 부름소리가 정겹게 뇌리에서 메아리친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시울도 젖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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