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나는 한가슴 꿈을 가득 안고서 조국의 꽃봉오리들을 양성하여 경제건설에 이바지하겠다는 결심을 다지며 귀국하였다. 낯선 곳에 가서 생활을 해야 하는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착잡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익숙하고 편한 것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생활에 도전하는 용기로 가슴 한구석에는 뿌듯한 기쁨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한국의 한 연구원에서의 계약기간이 만료되지 않았기에 귀국할 때 별도의 준비기간을 갖지 못해서 시간이 빠듯했다. 천진에 도착하자마자 이튿날부터 학교에 출근해서 대학교 교사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걱정은 하고 있었지만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생활인지라 처음부터 만만하지는 않았다.
사실 천진에 오게 된 것은 남편이 직장생활을 천진에서 하게 되어서인데 우리 둘 다 천진에 친척이나 친구가 한명도 없었다. 남편도 금방 천진에 오게 된지라 살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일단 경제호텔에서 며칠동안 투숙하였고 학교에서 너무 멀지 않은 곳에 집을 세맡아 주말을 리용해 이사짐을 옮겼다. 한국에서 부친 짐이 열 박스나 되었고 집 청소에 사야 할 물건도 가득했다. 남편은 택시를 타고 마트에 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들였고 나는 집에서 청소와 짐 정리를 했다. 이틀이 걸려서 대충 끝내고 나니 남편은 출장이란다. 전공이 건축업인 탓에 프로젝트 따라 움직여야 하는 특이한 직종을 가진 남편이다.
결혼 당시 남편은 강소성 소주의 한 건축회사에 근무하고 있었고 나는 한국의 모 대학에서 박사과정 중 수료를 끝내고 한 연구원에서 근무중이였다. 한국에서의 오랜 류학생활로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결혼을 늦추는 바람에 부모님들이 걱정을 많이 하셨다. 더 늦어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부모님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고 석달 만에 번개불에 콩 볶아 먹 듯이 결혼식을 올렸다. 내가 연구원에 휴가를 내서 소주로 날아가 선배네 집에 머물면서 며칠동안 남편을 만난 것과 한국에 돌아간 후 서로 메신저로 안부를 주고받고 한게 우리 련애의 전부였다. 그 후로 량가에서 결혼 얘기가 오갔고 음력설 전후로 해서 날자를 잡아 결혼식을 후닥닥 끝내버렸다. 결혼식 후, 열흘정도 남편이랑 함께 시간을 보내고 휴가가 끝나가면서 나는 한국으로, 남편은 소주로 돌아갔고 우리의 장거리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한국에 돌아간 후, 나는 계속 진행 중에 있던 박사학위 론문쓰기에 매진하였고 그 이듬해에 학위를 받게 되었다. 남편의 직장이 천진으로 결정되면서 천진의 대학교들에 리력서를 보내고 련락이 된 대학에 면접을 보고서 결국 지금의 대학교로 오게 된 것이다. 낯선 곳에 와서 아는 사람 한명 없어 도움을 청할 곳도 없고 남편마저 출장이지 처음부터 천진 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과도기간도 없이 새롭게 두 과목을 중국어로 강의를 해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대학교에서 새로 강의를 맡은 선생님들은 대학교 교사 자격증 공부를 따로 해야 한다고 해서 주말마다 토요일, 일요일 오전오후 수업을 들으러 다녀야 했다. 강의를 듣고 교사 자격증 시험을 보고 그 외에 강의 내용을 준비해서 강의하고 하느라 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첫 학기가 훌쩍 흘러가버렸다.
9년 간의 한국생활에 익숙해진 나에게 천진에서의 생활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처음이라 학교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도 많았다. 인사처에서 당안과 인사기록 관리하기, 과학기술처에 과제 신청하기, 재무처에서 과제경비 처리하기, 기술정보과에서 메일주소와 교직원카드 발급받기, 조직부에 공산당원 당적 관리하기, 학교 병원과 외부 사회보험부에서 의료보험카드 내기, 도서관에서 책 빌리기 등등 큰일이나 작은 일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면서 적응을 시작하였다. 생활 속의 사소한 일에서 조차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들이 많았다. 예상치 못하게 어느날 갑자기 전기가 끊기고 수도에서 물이 안나오고, 예고도 없이 핸드폰이 발신정지가 되어버리는 등 나를 당황시키는 일들을 많이 겪었다. 신용사회인 한국에서 이런 생활요금들은 모두 후불이었으나 중국에서는 얼마 안되는 요금도 카드에서0원을 기록하는 순간 사용할 권리를 당장 빼앗아가버렸다. 나는 처음부터 이런 작은 생활기능조차 당황스런 경험들을 통해서 학습해야 했다.
해외 박사학위를 갖고 있어서 소위 고층차 인재로 학교에서 영입을 했으나, 나는 당시 국내 상황을 잘 몰랐기에 영입 조건들을 인사처 담당자와 담판을 지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어떤 사람은 부교수 자리를 약속받고 학교에 들어오거나 정착지원금을 약속받고 들어오기도 했다. 그해5월에 학교에 와서 면접을 본 선생님은 주택 구매시 몇만원의 지원 혜택을 받고, 배우자의 일자리를 해결해주는 등 복리가 있었다. 나는6월에 면접을 보았는데 그때는 천진시 인재영입정책 변경에 따라 그런 혜택이 이미 취소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후에 인재영입으로 학교에 들어온 다른 교사들은 공동생활관 제공을 약속받는 등 혜택을 누렸으나 나는 그냥 무작정 학교로 들어와 버려서, 천진에 온 후 자체로 집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때 세들어 살고 있던 집은 공인중개사를 통한 한달 담보금에 석달 방값을 미리 지불하는 방식 (押一付三)이었다. 세 값이 꽤 비싼 집이었다. 학교에 들어온 후 나는 우리 대학교 다른 캠퍼스에 교직원 기숙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학원 원장을 찾고, 인사처 담당자를 찾아서 힘들다고 징징거려서 겨우50평방미터도 안되는 단칸방 교직원 기숙사(물론 요금은 자체 지불)를 약속받았다. 석달 후에 세를 맡았던 집에서 교직원 기숙사로 이사했다. 그 집은 계약 파기(이미 일년 계약을 한 상태였음)로 한달 담보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그냥 날려버렸다. 그 요금은 당시 내가 대학교에서 근무하는 한달 월급이었다.
나는 대학교 교사라는 남들이 보기에 괜찮은 직업을 갖고 있다. 다들 대학교 교사이면 여름방학, 겨울방학이 있고 한가해서 얼마나 좋냐고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교사들도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스트레스가 있고 부담도 크다. 청년교사일 경우에는 더 심하다. 교사들은 매년 론문도 써야 하고 과제연구도 해야 한다. 학교에서3년에 한번씩 임용평가를 실시하고 실적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면 계약해지를 당할 수도 있다. 수많은 뇌세포를 죽여가면서 겨우 완성하여 투고한 론문은 거절당하기 일쑤이고 아예 답신도 못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국가급, 성급 과제가 많다고 하지만 매번 신청을 한다고 해도 바다에 돌 던진격으로 아무 소식도 없다. 수업준비에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학생들 관리에 신경을 써야 되고(교사가 자기 전공의 학생 몇명씩 맡아서 관리하는 학생책임제를 실시), 학생들의 여러가지 다양한 과외활동과 동아리 활동도 지도해야 한다. 그리고 학생들의 졸업론문 지도도 대충 할 수가 없다. 매 학기마다 시험감독 임무도 완성해야 한다. 게다가 부교수, 교수 승진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애들 육아와 자신의 학업을 병행해야 한다. 방학간에도 크게 쉴 시간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나는 대학교 교사라는 직업을 사랑한다. 나는 젊음의 열정이 넘치는 학교의 생활이 좋다. 강의준비를 하고 강단에 서서 강의하고 학생들의 숙제를 검사하고, 학생들의 론문을 지도하고, 학생들의 물음에 대답해주고 하는 것이 좋다. 학생들을 위해 준비하고 또 지식을 가르치는 즐거움은 나를 성장시켰고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항상 자부감과 동시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있으며, 다음번에는 더 잘해야지 하고 다짐한다. 나는 젊음의 생기로 들끓는 캠퍼스가 좋다.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학생들, 학교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는 학생들, 친구들과의 이야기에 열중하는 학생들, 선생님에게 진지하게 뭔가를 묻고 있는 학생들… 이들을 보는 것이 좋다. 그리고 학교의 꽃, 풀과 나무들이 계절에 맞춰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보는 것이 눈이 즐겁다. 사계절이 교체되는 변화를 감격으로 느끼는 것이 좋다. 캠퍼스 내에서 산책을 하거나 학교 체육관에서 가끔씩 탁구를 하거나 배드민턴을 하는 것도 기분이 상쾌해져서 좋다. 학교 반경을 벗어나지 않고 맴도는 것이 즐겁다. 때묻지 않고 순수한 학생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나의 대학교 생활을 상기시켜서 좋다. 금방 스무살인 학생들과 함께 있으면 자신이 항상 청춘인 것 같고 젊음을 유지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생기발랄하고 희망에 넘친 학생들의 기운을 모두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진다.
대학교 교사라는 것은 석사과정을 밟을 때부터 나의 꿈이었고 나의 소망이었다. 전부터 나는 이 사회에 필요한 인간으로 성장하려고 노력하였고, 교육자로서 학생들에게 지식과 꿈을 주는 인재를 육성하는 사람이 되려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실력을 쌓고 능력을 키워서 꿈을 이루고 싶어서 나는 힘든9년간의 류학생활을 견디어왔다. 나는 가끔 류학생 시절의 옛일들을 회상하며 기억에 떠올리기도 한다. 온갖 감상과 감정이 봇물처럼 터져나와 주체하지 못할 때도 있다. 류학생활을 하는 동안 혼자서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괴로움으로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펑펑 운적도 많았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희망과 오래동안 간직해온 꿈 그리고 소망이 나로 하여금 낯선 땅, 낯선 환경에서 외로움을 벗 삼아 열심히 공부할 수 있도록 자신을 채찍질하게 하였으며 소중한 류학생활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금의 교사 생활을 생각하면 나의 청춘을 바쳐온 힘든 류학생활이 헛되지만은 않았다는 무한한 긍지와 환희를 느낀다.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고 학문의 세계를 계속 탐색해나갈 수 있는 나의 직업이 자랑스럽다. 내게 각별한 기쁨과 긍지를 안겨주는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좋다. 내가 대학교 교사로서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나는 나의 꿈과 소망을 이루는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