꺾이지 않으면 흔들려야 하듯 부러지지 않으려면 휘여져라!
궁극해 택한 잠언이다. 메뉴가 아이러니하게도 욕이다. 삶에 단서를 제공할 힌트를 준 탓이다.
-그 자식이 귀가 가렵지 않을가?
둘 이상의 복수자가 배후에서 제3자를 폄훼할 때 손으로 입을 막고 경계하는 단속훈시이다. 이 무렵 난 되려 배포가 유하다. 귀신 듣는데 떡소리 한다고 마냥 고맙다겠다. 모욕이 되려 반전의 모멘트로 불끈 솟는데야...
외압적인 언사로 막말이 생겨난 배경에 주목이 쏠린다. 그런 시처위에 소인을 자주 퍼포먼스로 등장시키는 최근 인적사항이다. 시련과 좌초와 체험의 의도적 담금질이다. 그럴수록 등뒤에서 들리는 욕지거리에 스릴을 찾을 때가 두간했다. 귀에 거슬린 구설수가 석연한건 그만큼 용납할 그릇이 커진 등비급수이다.
우선 직언에는 정당성이 있다고 믿어줘야 내 속이 덜 불편하다. 창호지 밖에서 간질이 듯 깔깔대는 병아리의 오열을 듣는 청감이라면 어떨가싶다. 무지근하던 숙변을 제거한 배설자의 쾌기가 꾸역꾸역 밀려든다. 난청의 모독패찰을 등뒤에 달고 다니던 날에 대한 청산이다. 허파가 빈 궁근 탁음이 절명을 치를 때 작히나 안도의 숨을 들이그었으랴?! 한즉 후론이란 뱉은 자의 권위이고 수납자는 소화여하로 효력을 결론한다. 총성이 살상을 초래했다면 비판의 정조준은 세균을 죽인 파생음이다. 복수자의 희열은 번열의 압승이다. 그것을 선고한 전령사한테 드리는 비극속의 사은품이 박격이렷다. 얼음장이 짱- 갈라진다. 겨울에 듣는 비난의 줄기찬 괴성이다. 햇봄의 눈석임물이 달려갈 활주로가 열린다. 현수교를 드나들며 산전수전, 남정북전을 치른 총화답다. 로열티를 지불해서라도 사용하고싶은 응분의 소비임에랴...
-밥 채우듯 욕을 처먹어도 소귀에 경 읽기야~...
이맘 땐 상황이 다르다. 마이동풍으로 무척 건방진 안하무인이다. 응당 자양분으로 섭취해야 할 비타민도 버렸으니 파잡아 마땅하다.
마른 땅이 터갈라져 거북등이 된다. 단비로 소용돌이칠 합수목이 처깔한 빗장을 열어젖힌다. 그렇다. 이런 입수는 귀에 거슬리는 타매도 세척한다. 홍역을 치르더라도 능히 선탈한다고 할거다.
정보시대의 콤플렉스를 해소하는 발성련습이나 시창교정의 리허설로 받아들이자는 제의가 욕설과 긴축된다. 인절미 팥고물 묻히듯이 싸잡아 몰아붙이더라도'피해자'에겐 저항력을 제공할것이니 말이다. 사산분리(四散分离)는 새로 결집을 위한 잠시 간극이라면 흔단은 영구적 시너지를 노린 공간마련인 근본에서이다. 그 단초와 과정을 마정방종(摩顶放踵)으로 어필하는게 바로 이른바 험담의 질책과 사명이다. 간드러질 대신 거칠고 녹여낼 대신 허스키하다. 그런 톤으로도 능히 조직적인 파괴력을 보여 무척 생광스럽다.
-끌끌... 욕을 두사발채 먹었더니 정신이 버쩍 든다! 푸푸크크~...
-돌대가린 한타스 쑤셔넣어도 반응 없니라!!...
꽤 호기를 보인 탈쇄이다. 복용치고는 윤문처럼 세련되고 벼이삭처럼 되알지고 핵무기처럼 초강력이다. 마침내 틀을 깬채 돌파구를 찾은 원색비난의 부메랑은 새 활주로에서 또 분출구를 만난다. 사회존재의 신빙성이자 인류발전의 모션이다. 욕의 직격탄을 명중 당한 이는 서서 혹은 앉아서 로심초사하고 고민의 늪에 스스로를 미끼로 던져본다. 비릊는 동작으로 탈태를 꾀고 좌망으로 둥지를 찾는 시간이다. 에덴동산에서 라체로 살던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금단의 열매인 사과를 먹은 뒤부터는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나무잎으로 치부를 가렸다. 우리도 어쩌면 왈시왈비의 세례를 받아 자제하고 주체하고 정제하나보다.
고부간에 갈등이 생겼다. 며느리가 시어미니를 죽으라고 구시렁거렸다. 그런데 파파로인은 날로달로 끼끗했다.'욕 세사발에 삼천갑자를 산다'는 대목이다. 비상을 먹여주기보다 독과(督过)를 대접하면 장수한다는 박대의 반론이다. 첩살이하는 식부일화는 아니다. 과시 욕에도 자양분이 섞였나보다. 지탄의 교감속에 격변기는 희망의 신생아가 속출할 줄 소신하는 시점이다. 누더기를 팽개치고 껍질을 떨쳐버렸으니 알쭌한 신생사물이 대거 쇄도할 조짐임에랴...
모든 감수성에는 소리가 있다. 그 중 욕의 비중도 만만치 않은 수치를 점한줄 안다. 피션(fission)은 핵분렬로서 일종 세포와 원자의 삼분오열도 의미한다. 잠시 인류를 담은 그릇도 종당엔 폭발을 면치 못한단다. 힐책도 멈추고 엉키며 깨지고 뭉치면서 부단히 응집에 투신한다. 그렇다. 세상이 바뀌는 계기조차 없어졌다가 얻음이다. 하여 째지고 단절되고 궤결(溃決)한다고 해서 상처나 딱지 또는 훼손이 아니다. 그런 의심속에서도 다행스러운건 독선에 빠진다. 폄사는 그 나락속에서 유익한 정보를 위해 승격의 나절을 길들인다. 거슬리고 성가셔도 나중엔 효험을 주고야마는 직성으로 속세에 군림한것이다. 신들린 폭죽마냥 욕지기가 내장된 기능으로 제 몸을 가른다. 잠그었던 이슬이 통째 부서져서야 뿌리와 키스한다. 각자 주어진 사명에 사력을 걸고 최후를 철저히 치르며 후회를 접는다. 욕도 그런 질서로 점차 우리와 공존하는 리유이다. 매듭을 풀고 응어리를 녹이는가 하면 비틀린 단추를 맞추며 사개맞게 개입한다. 부풀린 탄력이 여한을 푸는 부력인줄로 알겠다.
보약은 건강을 돕고 욕설은 건재를 맡는다.
2018년1월16일 화요일 오후6시49분 병원복도, 판타지 압권에서 들리는 야차의 갈린 괴성에 모골이 송연했다."다신 전화 말라"는 비린청은 생청스러운 악다구니만 아니였다. 이승과 저승간의 불협화음은 악녀의 액색으로 점철됐다. 천국의 녀자귀신은 텔레파시를 거부하고 필추니로 내관의 위안부란다. 달첩의 원흉을 가린 베일이 벗겨졌다. 유명계의 흥와조산(兴讹造讪)에만은 귀머거리로 돼야겠다. 실언이 염라왕을 만나고 성명(性命)이 부활한 환청의 봄우뢰가 터졌다. 새수난지라 그래서 들숨을 트림처럼 올렸었다.
폭언이 충언이다. 망담이 환담이다. 과연 이런 경지에 림할수 있을가? 욕설의 미학에 초학자로 모자이크했다. 본질과 구조를 해명하는 학문의 교하생으로 초빙됐다. 그런 회자로 장수하는 콘텐츠계승이기를 원하련다. 자타의 삶과 더불어 부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