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종이공장에 출근하시는 아버지 한사람 월급으로 다섯 식구가 먹고 살아야 했던 까닭에 우리집 가정형편은 좀 어려웠다. 어머니는 하루종일 식구들의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지런히 맴돌아야 했다.
내가 철이 좀 들어서부터 어머니는 나보다 세살 아래인 쌍둥이 녀동생을 나에게 맡기고 장사에 발 벗고 나섰다. 송편, 소빵도 만들어 팔고 콩나물도 길러 팔고 김치도 담가 팔고 과일을 되거리해 팔기도 했다. 하여튼 돈이 되는 장사라면 닥치는대로 하면서 악착스럽게 번 푼돈을 생활에 보태군 했다. 가난한 집 아이가 철이 일찍 든다고 그 때부터 나는 점심이나 어른들이 일을 마치고 늦게 들어오는 날 저녁이면 스스로 밥을 짓군 하였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가마솥에 밥을 하고 료리를 했다. 맛을 내는 양념이 고작 소금이 전부였지만 배가 고프다고 울어대던 두 녀동생은 기특하게도 내가 해준 밥을 잘도 먹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식탐이 많았다. 무우, 감자, 배추, 가지, 김치... 좋은 반찬이 없어도 밥에 얹거나 말아 훌훌 잘도 해제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부터 조금도 과장 없이 한끼에 한소래씩 먹기가 일쑤였다. 그렇게 많이 먹어도 점심과 저녁 하학할 무렵이면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에 부끄러워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게걸스레 퍼먹는 아들을 바라보며 조금은 걱정이 되는 표정을 짓군 하였다.
어쩌다 고기구경을 하려면 설명절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어릴 적에는 설명절을 더 손꼽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한번은 음력설에 훈춘림업국에서 운전수로 계시는 큰이모부께서 짐차에 통돼지 한마리를 싣고 외할머니네 집에 설 쇠러 왔다. 시허연 통돼지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어른 다섯, 아이 다섯 이렇게 식구 열이서 지져 먹고 구워 먹고 튀겨 먹고... 하여튼 근 보름동안3백근이 넘는 돼지 한마리를 다 먹어버렸다. 암만 먹어도 배가 고프던 어린 시절에 남은 기억이란 음식에 관한 것 뿐이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아마 그 해 음력설에 난생 처음으로 돼지고기를 맛본 것 같다.
아버지는 강낚시를 아주 즐겼다. 여름철 휴식날이면 아침 일찍 자전거에 나를 태우고 가야하 상류쪽으로 한시간 가량 달려 버드나무가 우거진 강뚝 낚시터에 이르러 낚시대로 쓸 곧고 기다란 버드나무가지부터 몇대 잘랐다. 낚시대의 가는 끝에3미터 가량 되는 낚시줄을 동여매고 낚시줄의 자유로운 끝에 죄꼬만 낚시를 두개 갈라 맨 다음 큼직한 연돌을 헐렁하게 단 후 낚시에 미끼로 지렁이를 꿰여 강물에 던지면 곧 물고기가 물리기 시작한다. 그 때는 강에 물고기가 참 많았다. 크고작은 돌종개, 모래무치, 버들치들이 줄줄이 올라오는 가운데 한뽐씩 되는 큰 놈도 수두룩하였다. 입이 큰 모래무치는 미끼와 함께 낚시를 통째로 삼켜버리기가 일쑤였다. 점심시간이 되면 양념으로 쓸 내기풀을 찾아 한줌 뜯어 씻어오고 큰 돌을 몇개 주어다 간이부엌을 만든 후 땅에 널려있는 마른 나무가지를 주어 땔나무로 썼다. 냄비에 부근의 샘치물을 가득 퍼다 담고 끓인 후 갖고 온 감자, 배추, 파 따위의 남새 그리고 내기와 쌀을 넣은 다음 고추장을 두둑이 풀고 끓이다가 밸을 딴 세치네를 집어넣어 어죽을 푸짐하게 쑤었다. 아버지가 아니라면 나 혼자서라도 한 냄비를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쑨 어죽의 환상적인 맛은 마흔이 된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대학교 입학수속을 할 때 받은 건강검진 기록에 내 키는176센치미터에 몸무게가54킬로였다. 키만 컸지 야윈 몸집이였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곧바로 출판사에 취직하고 연길에 정착하였다. 회사 식당에서는 반찬 세가지에 국 하나로 된 점심 한끼를 제공했는데 그 음식에 불만을 토로하는 사원들이 적지 않았다. 대충 만든 거친 음식이라는 둥, 너무 짜다는 둥, 맛이 없다는 둥 핑계를 대며 밖에 나가 점심을 해결하는 사원들이 많았다. 그러나 여직껏'맛'보다'량'을 추구하던 나에게 회사 점심은 그야말로'진수성찬'이였다. 한번은 식당에서 배추김치와 돼지고기를 칼탕 쳐 만든 소를 넣은 소빵을 했는데 워낙 김치소빵을 즐겨 먹던 나는 단번에8개를 식판에 담았다. 그러자 대뜸 주위의 시선이 나를 자극했다. 동기와 후배들은 괴물이라도 만난 듯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선배들은 별 희한한 자식을 본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 날 남들이 다 간 뒤에 슬그머니 주먹만큼한 소빵을2개 더 가져다 먹었다. 하여간 남이야 뭐라 하든 나는 매일 나름대로 점심을 회사에서 맛있게 잘 먹었다.
출근하면서 결혼이거나 환갑 그리고 첫돌생일 잔치를 다닐 기회가 잦았다. 사회가 끝나기 바쁘게 나는 산해진미로 장식된 음식상을 향해 저가락을 휘두르며'전투'를 벌리군 하였다. 한번은 아는 형이 옆에서 지켜보다가 통풍이라도 걸리면 어쩌는가 하면서 적당히 먹으라고 말하자"그런 건 재수 없는 놈들이나 걸리는 거여. 난 타고난 바탕이 좋아 그런 덴 신경 안 써도 될 듯하우."라고 지껄이면서 맛나게 먹어댔다. 이른바 자존심, 체면 따위는 배부른 다음에 하는 얘기이다.
이러는 나를 보고 안해는 모인 자리에 가면 먹다 죽은 귀신처럼 허겁지겁 먹지 말고 신사답게 천천히 먹으라고 항상 나무랐다. 그렇게 많이 먹어 좋은 점이 하나도 없으니 좀 적당히 먹으라고 귀띔하는 말을 나는 먹어서 탈이 없으면 그만이지 하는 식으로 언제나 귀등으로 흘려보내군 하였다.
어머니는 종종 나를 만나기만 하면 살이 좀 빠진 것 같다고, 한창 자랄 나이에 좋은 걸 먹지 못해 영양실조라도 올가봐 걱정을 많이 했다고 습관처럼 외우셨다. 그리고는 번마다 손수 해둔 밑반찬이며 고추장, 된장 따위를 집에 가져가 먹으라고 챙겨주셨다. 그러는 시어머니를 보면서 안해는 항상 어느 세월이라고 아직도 많이 먹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가며 두덜대군 했다.
무릇 잘 먹지 못하던 세월을 보낸 사람이라면 음식을 아끼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애들을 아니꼽게 생각한다. 지금의 애들은 음식물이 무진장 생기는 줄로 알고 있는 듯하다. 분명 랭장고 안에 그리고 식탁 우에 간식거리들이 가득 쌓였건만 하필이면 꼭 없는 것을 기어이 내라며 울고불고 떼를 쓴다. 그걸 당해낼 부모가 어디 있으랴. 우리 집 애들도 마찬가지이다. 껍질을 깎아준 통사과는 둬입 먹으면 그만이고 새우깡 따위도 포장을 터치면 한번에 다 먹는 일이 전혀 없다. 많이 먹지 말라고 항상 핀잔하던 안해도 애들과 남은 간식을 번갈아 보더니 나를 바라보면서 시물시물 웃는다. 그러면 나는 두말없이 그것들을 몽땅 입에 집어넣군 한다. 영양과잉에 한몫 톡톡히 한 셈이다.
우리의 표준대로 요즘 애들에게 요구를 제기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딸애가 어릴 때 함께'성냥 파는 처녀애'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읽는 도중 딸애가 문득"아빠, 성냥이 뭐예요?"라고 물었다."엉?!" 딸애에게 보여주려고 집구석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봐도 성냥 한가치 찾을 수 없었다. 아파트 대문 앞에 있는 슈퍼에 내려가 물어봤더니 성냥은 사는 사람이 없어 아예 들여오지 않은 지 오래됐다는 것이였다. 하는수없이 일부러 시내 중심에 위치한 대형 일용품상점에 가서야 어디다 쓸지도 모르는 성냥을 겨우 한갑 살 수 있었다.
우리 신변에서 사라지고 있는 물건들이 적지 않다. 방아, 지게, 절구, 물레, 풍로, 서까래, 독… 멀지 않아 이런 물건들은 박물관에 가서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회의 진보와 기술의 발전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스마트폰을 위수로 하는 전자제품들이 일상생활에 깊숙이 침투되여 우리의 생활방식을 심각하게 개변시키고 있다. 저금통장을 들고 저금소에 찾아가 줄을 길게 서서 한나절씩 기다려야만 할 수 있었던 관련 업무들이 이제는 핸드폰이나 컴퓨터 따위의 기기들로 앉은 자리에서 해결이 가능하다. 알리페이와 위챗 따위의 거족적인 발전 그리고 QR코드지불이 급속히 보급되면서 우리는 이른바'무현금시대'에 진입하였다.
생활은 분명 많이 좋아졌다. 초가집에서 살면서 아침에 일어나자 바람으로 휴지를 찾아들고 변소를 찾아 허둥지둥 뛰여가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젠 집안에 화장실이 두개씩이나 딸린 아파트로 바뀌였다. 여러해 전에 회사에서 아파트를 공동구매할 때 여유가 있는지라 부모님들께 드릴 타산으로 자그마한 집을 하나 사서 부모님을 연길에 모셔왔다. 그런데 이사하자 바람으로'로망'을 부릴 줄이야!
집 근처에 남새도매시장이 있었다. 어머니는 매일이다싶이 거기에 들려 장사군들이 버린 배추잎을 골라서 주어왔던 것이다. 얼마나 신선한 배추잎이냐고, 쌈을 싸 먹거나 국을 끓여 먹으면 딱이라고 앞에서 자랑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참지 못하고 대뜸 화를 냈다. 먹을 것이 없어 그러냐고, 아버지 퇴직비가 있지 않느냐고, 달마다 생활비를 드렸는데도 모자라 이러느냐고, 동네에서 살고 있는 우리 회사 선생님들이 보면 내 얼굴에 먹칠하는 거 아니냐고 화김에 마구 내뱉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어머니가 아들 얼굴에 먹칠을 하는 거 아니냐는 말에는 얼굴색이 대뜸 굳어졌다. 아마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화를 좀 삭이자 어머니는 먹을만한 것을 그저 버리는 게 아까와 그랬다며 다시는 주어오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나를 위로하였다. 마구 화를 낸 자신이 미워 미안한 마음에 호주머니에 있던 돈을 모두 꺼내 돈이 필요 없다고 연신 말하는 어머니 손에 억지로 쥐여주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뒤 집을 나왔다.
평생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찔 것 같지 않던 내 몸도 이젠80킬로를 육박하고 있다. 일년에 한번씩 받아보는 건강검진 결과에 언제부턴가 오르내리는 화살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먹새도 그전보다 많이 줄어들었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신사처럼 먹을 때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