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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약방VIP - 류선희

2021-12-12 15:08:10

섣달 그믐날이다.

비행기가 연길 공항에 도착하여 짐을 찾아 나가는데 아버지가 벌써 출구에 서서 내가 나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니 엎어지듯 달려나오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어머니가 문을 활짝 열며 꼭 껴안아준다.

따뜻한 집안에 들어서니 벌써 한상 가득 차려진 노란 밥상이 상다리가 부러질듯 겨우 버티고 서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우로 어머니가 집어주는 반찬이 계속 소복히 쌓이고 입도 두손도 너무 바쁜데 어머니가 또 작은 토종계란 하나를 쥐여준다.

"얼른 먹어. 내 어제 약방 가서 계란을90개나 가져왔다."

"약방에서 무슨 계란을 그렇게 많이 줍니까?"

"내 거기 VIP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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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말에 집안 구석구석을 유심히 살펴보니 정수기 우에도 텔레비전 옆에도 손이 쉽게 닿을만한 곳에는 모두 약통들이 놓여있었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동생이 작년에 집에 왔다가 어머니가 너무 약에 의지하는 거 같아 병원에 모시고 간적이 있었다. 병원에서 돌아온 동생은 의사 말에 의하면 어머니가 약에 대한 강박적인 의뢰 증세가 있다더라고 전하면서 울먹거렸다. 동생은 집에 있는 석달 동안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보살펴드렸다. 하지만 마음마저 약으로 치료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동생에게서 어머니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으며 어느 정도 안심을 했었는데 오늘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나니 또다시 마음이 무너지는 느낌이였다.

"어머니..."

"오... 먹어먹어. 아니야, 예전보다는 많이 줄였다."

어머니는 젓가락을 내려놓는 나를 그렁그렁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을 잇는다.

"나는 그냥... 아픈게 제일 무섭다. 내가 건강해야 너희도, 너희 아이들도 내손으로 봐줄 수 있잖아. 혹시 치매라도 오면 어쩌나 늘 걱정이다."

누구 말도 듣지 않는 고집이 센 어머니가 한없이 약해져서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애원하듯 얘기하는게 마음이 너무 아파 나는 차마 아무 말도 못했다.

어머니 곁을 잘 지켜드리지 못해 당신을 늘 외롭게 만든 가장 큰 장본인이 나인데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가?

언제부터인가 어머니는 남편보다도 자식보다도 자신보다도 약을 더 많이 의지하셨다. 서랍속에는 영양제, 보건품, 혈압약 그리고 들어도 못본 약들이 늘 꽉 들어차 있었고 조금만 줄어들어도 어머니는 불안하여 인차 약방에 달려가 사와서 채워놓군 하셨다. 같이 있는 동안에도 가끔 식사는 걸러도 약은 꼭꼭 제때에 챙겨드셨다.

그리고 년말이 되여 청소기, 믹스기, 이불따위를 증정품으로 받아와서는 나와 동생에게 나눠준다며 알뜰하게 싸두었다가 우리가 오면 냉큼 꺼내놓군 하였다. 마음 속에서 빠져나간 자식이란 구멍을 약으로 메우고 그렇게 힘을 얻어 먼 곳에서 매일같이 자식들에게 응원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 나랑 같이 청도에 가서 살아요."

"아니, 나는 여기가 제일 편하다. 여기서 우리 은주 열심히 유치원 보내야지. 걱정마. 은주 요놈이 생긴 다음부터는 힘이 펄펄 나서 무슨 건강약품도 다 필요없다. 너희 둘을 키울 때보다 더 힘이 난다."

나는 이래저래 설득해보다가 결국 포기하고 어머니가 다닌다는 약방에 같이 가보기로 했다.

문을 열자마자 가족을 만난듯 반가운 얼굴로 맞아주는 약사와 판매원, 그리고 얼굴에 화색이 돌며 기쁘게 인사를 받는 어머니, 어머니는 확실히VIP대우를 받고 있는듯 싶었고 약사는 어머니께 이것저것 안부를 물어보더니 또다시 어머니가 자주 사는 영양제 보건약품들을 자연스럽게 세트로 모아 올려놓는다. 그래도 다행히 약방은 전국에 널리 알려진 프랜차이즈체인점이였다. 나는 무엇인가 문의하려다가 스스로도 웃기고 황당한 일 같아 입을 다물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불편한 거래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막무가내로 약 설명서만 줄창 열심히 살펴보았다.

동생이 어머니를 한국으로 모셔도 가보았지만 평생 살던 고향을 떠난 어머니는 적응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메말라만 갔었다. 그러다 조카가 태여나면서 외손을 데리고 귀가한 어머니는 애기 똥오줌을 받아내는 것부터 유치원에 데려가는 것까지 챙기며 다시 어머니의 역할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이 복덩이가 있어 어머니는 얼마나 힘이 나는지 몰라."

자신의 손자손녀는 절대 누구 손도 거치지 않고 직접 키운다고 하며 오늘도 어머니는 여유만 생기면 여섯살된 손녀를 집안에서 업고 다니신다.

어느새 훌쩍 커서 할머니 잔등까지 두드려주는 조카가 이제는 어머니의 마음 한구석에 크게 차지하고 있던 약을 밀어내고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시장에 다녀오는 길에 그 약방을 드나드는 수많은 로인네들을 보면서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어르신들만 남겨진 고향엔 그들을 진정 지켜드릴 수호천사 대신 매년마다 약방들이 즐비하게 늘어선다. 타지에서 외국에서 자식들이 열심히 벌어 보내드린 돈으로 약방은 더 크게 확장되고 늘어가고만 있다.

부모님들을 지켜준답시고 되려 건강을 좀먹어가는 보건품, 영양제보다는 아들딸들의 따뜻한 사랑이 가장 필요한 영양제가 아닐가.

나는 어머니의 힘없는 손을 잡으며 깊은 반성을 하고 있다. 더이상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호강시켜드리겠다는 어리광만 부리지 않고 이젠 당신의 느린 발걸음에 맞춰가는 삶이 되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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