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이팔청춘 꽃 나이같은데 벌써 지천명이라니. 뭐가 그리 급해서 허겁지겁 나이를 집어삼켜 흰서리까지 이마를 덮게 만들었나.
지난 세월 채이고 긁히고 뒹굴어 온몸에 상처자욱 랑자한데 화려한 가죽이 나를 비웃는구나. 아직도 남은 허영을 버리지 못하고 애써 욕망을 짓누르며 살고 있다는 반증일가.
차갑게 불어치는 바람에 찟기워도 나랑 상관도 없이 겨울나무처럼 살가죽 터가면서도 뿌리만을 굳게 지키면서 살아야 했음을 왜 이제야 깨닫게 되는지, 맞받아 바람을 막으려면 나만 지치고 아프다는 것을 왜 이제야 알게 되는지.
삶은 급행렬차에 탑승한 것과 다름없다.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몇 개나 견뎌내야 찬란한 해살줄기를 맞이할 수 있을소냐. 지친 몸 이젠 쉬고 싶구나.
어느 이름모를 정거장에 멈춰서서 기다림도 미련도 없이 지나온 내 발자취만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하얀 눈이 더럽혀진 대지를 살포시 감싸준다.
왜 이렇게는 못살았을가?
왜 그렇게는 못살았을가?
왜 저렇게는 못살았을가?
그따위 후회같은 건 집어치워. 인생은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지만 과거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내여줄 시간은 없어. 미래에 너무 부담주기도 싫어. 하루하루 지금 이 시각들을 반짝반짝 놋그릇 닦듯이 깨끗이 닦으면서 살고 싶어. 그리하여 그 하루하루가 쌓여서 여생의 페지들을 장식하게 하고 싶어.
십년 이십년 후에도 살아온 그대로 살거라고. 후회없는 삶 살았노라 자부할 수 있게 살고 싶다.
머리 희끗희끗 하얀 서리 내려도 지금처럼 애써 염색하지 않고 구태여 화장을 안하고도 그 자체로 빛이 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애들은 날고 싶은 곳으로 보내주고 나는 나름대로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그이와 손잡고 들녘을 바장이면서 여직 만든 노래들을 흥엉거리며 빨갛게 물드는 황혼을 맞이하고 싶다.
굽이굽이 돌아서 어렵게 만났어도 내 평생 그대만을 사랑했노라고 늦은 고백이라도 하고 싶다.
아주 천천히 걸으면서 힘들면 황혼 한 자락 깔고앉아 쉬면서 라일락 향기 묻어있는 추억을 뒤적이며 지는 해를 맞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