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설을 맞이한 기억 속에도 제일 잊혀지지 않는 것은 1970년대 초, 혁명이 지속될 수록 생산은 떨어지던 때였다. 그 때는 북방에 과일이 흔치 않아 명절 림박이라야 조금 맛볼 수 있었는데 질좋은 사과나 배는 거의 구경도 할 수 없고 꽁꽁 얼어서 돌멩이같은 언배조차 일반인에게 차례지기쉽지 않았다.
1973년, 설명절을 앞둔 어느날 공급판매합작사에 언배가 많이 왔다는 귀소문을 듣고 나는 아침 일찍 빈 가방을 메고 갔다. 언배라도 넉넉히 사서 설명절 선물로 아이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였다.
공급판매합작사에 이르니 나처럼 소문을 듣고 모여온 사람들로 아침부터 붐비였는데 서로들 먼저 사겠다고 밀고 닥치며 아우성을 쳤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공급판매합작사 점원은 사람들에게 상자 안에 들어있는 종이쪽지를 한장씩 쥐게 하고 그 종이에 적힌 순서에 따라 1번부처 차례차례로 언배를 사게 했다. 그때 나에게 차례진 것은 50번이였다. 별로 희망이 없었으나 그래도 행여나 하고 기다렸는데 공교롭게도 내 앞 번호인 49번까지 배를 사고나니 배가 똑 떨어졌다. 참으로 맹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언배를 못 샀으니 집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집에서 이버지가 배를 사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릴 아이들 앞에 빈가방을 내놓을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망설여졌다. 이때 누군가 오후에 향에 있는 총공급판매합작사에서 배 한톤을 보내온다고 방금 전화가 왔다고 말했다. 하여 나는 아무리 지루하더라도 아이들을 위해 꼭 기다리기로 했다. 그 때 시간은 겨우 오전 열시를 넘겼다. 어느덧 짧아도 지루했던 겨울해가 기울어 황혼이 되여갈 무렵이 되였다. 밖에서 오래 기다렸던 말마차 소리가 들렸다. 그 때는 공급판매합작사에 물건을 모두 마차로 실어왔으므로 언배가 온줄 알고 반가와 뛰쳐나가 다짜고짜 마부에게 "언배가 있는가?"고 물었다. 그런데 언배는 무슨 언배, 몽땅 석탄이란다. 누군가 나를 놀리기 위해 석탄 한톤을 실어보낸다는 전화를 일부러 언배 한톤 보낸다고 거짓말을 한 것을 내가 어리숙하게 곧이 들었던 것이다. 하긴 누구의 발상인지 몰라도 또글또글 덩어리진 까만 석탄은 흡사 새까맣게 언 배알같아 보여 그 많은 석탄덩이들이 언배였으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생각을 가져보기도 했다.
이렇게 설이 되여도 자식들에게 그 못난 언배 한알조차 사주지 못한 죄책감이 세월이 흘러도 그냥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어선지 요지음 간혹 설명절을 앞두고 시장에 가서 이것저것 돌아보다가 시장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언배광주리를 볼 적마다 73년 그 해의 설명절이 떠오르군 한다. 그 때 만일 오늘처럼 설맞이 먹거리가 넉넉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가.
그러나 이 세상 모른 만물이 절대적인 것이 없 듯 설명절 또한 그러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 시장에 언배는 가득한데 함께 설을 쇨 가족은 곁에 없는 것이다. 장성한 자식 셋이 모두다 저 멀리 이국에 가서 생활하고 있고 안해조차 이 몇년간 줄곧 외국돌이를 하면서 우리 가정은 설이 되여도 한자리에 모여앉지 못하여 혼자 설을 쇤지가 벌써 몇년 세월이 잘 된다. 나뿐이 아니라 내가 사는 곳의 주위를 돌아보아도 혼자 설을 쇠는 사람이 많은데 요즘 이런 사람들을 신조어로 혼잡족이라고 한다. 그러니 나도 혼잡족인 셈이다. 그러나 그닥 슬프거나 외로워하지 않는 리유는 현실이 그러하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밖에 나가 설을 쇠는 자식에게서 가슴 찔리는 계시를 받은 적이 있기때문이다.
지난해 설을 쇨 때였다. 초하루날 아침 아들의 인사 전화를 받고 너는 어떻게 설을 쇠는가 물었을 때 설날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만민이 다 쉬는 설날에 일을 하다니? 이는 누가 시킨 것이 아니요 자신이 선택한 것으로 설에 일하면 로임도 곱절 많다는 것이였다. 놀면 무엇하는가? 설을 쇠도 일손을 멈추어서는 안 되는 직장이니 돈도 벌고 남들의 휴식도 위하고 꿩먹고 알먹기가 아닌가. 일년 중에도 가장 큰 명절이라고, 그래서 설엔 만사를 제치고 논다고 하는데 설날에도 쉬지 않고 일하는 아들의 설맞이에 비기면 까짓 혼자 설쇠는 것쯤의 고독과 외로움따위야? 시장에 가면 온통 먹거리니 내 먹고싶은 것 골라가며 마음껏 먹고 텔레비 보고 싶으면 보고 음악을 듣고 싶으면 듣고 게다가 이젠 스마트폰까지 할줄 알아 친구들과 위챗 채팅도 하고… 아들의 전화를 받고부터 설을 대하는 나의 관념도 달라졌다. 아무리 설, 설하며 떠들어도 사실 지나고보면 설이 무언데? 너무 요란 떨지 말고 하루 묵묵히 지나면 그만 아닌가? 더구나 지금은 날마다 설같이 지나는데야 더욱 그러하다.
물론 같은 값이면 분홍치마라고 민족의 최대 명절이라는 설날 가족들과 한데 모여 왁작복작하며 지낼 수 있다면 그 이상 좋은 설맞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그러한데야 어찌랴. 기실 나나 다른 사람들이나 달갑게 혼잡족이 된데는 현실에 순응하는 순발력도 있겠지만 지금은 전과 달리 스마트폰이란 아주 발달한 현대소통 도구가 있어 평상시 몇천리 밖의 자식들과도 늘 얼굴을 마주 보면서 통화를 나누기에 그리움이 덜한 것이다. 한편 올해 설에도 가족이 만나지 않는 것은 만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만날 수 있음에도 만나지 않은 것이다. 설 림박엔 비행기표값도 하늘로 치솟은데다 그 며칠 설을 위해 자식들이 한번씩 부모의 집을 다녀가자면 비행기만 꼬박 열세시간을 타야 하는 지루하고 긴 로정, 고생도 고생이거니와 너무 많은 대가를 낸다. 이에 누구는 "자식과 부모간에 정이 중요하지 돈이 중요한가?"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정도 물질이 안받침되여야 더 돈독하지 않을가. 마치 부모와 자식이 함께 있으면서도 언배마저 없어서 먹이지 못할 때 그 설을 쇠는 기분이 허전하다못해 처량하기까지 했던것처럼.
그러고보면 내가 외로움과 고독을 극복하고 혼자 설을 쇠는 것은 자식들을 고생시키지 않기 위함이다. 내가 아무 고민도 절망도 하지 않고 고독하면 고독한대로, 외로우면 외로운대로 대범하게, 그러면서도 간단하게, 소박하게 그리고 더 나아가서 거뜬하게 설을 보낸다는 것이 그만큼 자식들의 삶을 도와주는 것이 되여 올해의 설도 그렇게 맞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