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성 학강시 라북현 현성 봉상진에서 자가용으로 10여분 달려 남쪽에 있는 조선족마을 신흥촌에 이르렀다. 거리는 20km로서 현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조선족마을이다. 시멘트길로 포장하기 전에는 자전거로 한시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였다.
마을의 호적은 130가구인데 현재 5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40여가구가 현성에 거주하고 있다. 수전면적은 3800무이며 촌민 4가구가 1200여무를 경작하고 있다.
마을 변두리에 면적이 꽤 큰 창고가 보였는데 농기구를 보관하는 창고라고 마을 관계자가 설명했다. 최근 몇년 농기구 갱신속도가 빨라지면서 자주 바꾸다보니 수량도 많이 늘어났다.
1982년부터 20년 넘게 지부서기를 맡았던 김재수(73세)씨를 만나 얘기를 들어봤다. 그는 "전에는 향에 회의가 있으면 소수레를 몰고 다녀와야 했다. 소수레가 없어 두시간 걸어서 다닐때도 있었다. 한번 회의하러 가는게 힘들었다. 가장 곤란한 마을이였다"고 회억했다.
한 지인은 “어릴적 신흥촌 친척집에 놀러 갔는데 오이를 먹고 꽁지를 창문밖에 버린다는게 그만 유리를 깼는데 몇년동안 유리를 바꾸지 않고 비닐로 막은 그대로였다”고 회억했다.
신흥촌은 원래 현성 남쪽에 있는 단결향에 소속돼 있다가 80년대 동명조선족향이 설립되면서 동명향에 편입됐다.
단결향에 소속돼있었던 마을은 신흥촌을 비롯해 홍선촌, 신성촌이 있다. 원래 단결향에 조선족마을은 홍선촌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신흥과 신성이 분리돼 나와서 생산대대가 설립되고 마을이 형성되여 조선족마을이 세개로 늘었다. 신흥촌은 70년대초에 분리돼 나왔는데 경작지가 멀어 처음에는 다니기 불편해 결국 경작지와 가까운 곳에 옮겨온것이란다.
현성에서 멀다보니 마을 형편도 곤란했다. 김재수씨는 "전에는 살던 집이 모두 뙤짱으로 쌓아올려 지은것이여서 쥐가 잘 들었다. 70년대 마을에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 한호 있었는데 수십명이 시청하러 모여들어 가관이였다"고 회억했다.
후에 호도거리책임제를 실시하면서 촌민들의 살림이 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천년대 초에 농업세가 취소된데다 벼 수매가격도 1.6원에서 1.7원까지 올라 소득상황이 좋았다.
또 90년대부터 본격 시작된 한국로무의 덕을 입어 촌민들의 생활이 점점 좋아졌다. 이어 촌민들은 현성에 아파트를 마련하기 시작했고 후에는 로인협회까지 시내로 옮겼다. 마을에 회의가 있으면 시내에 사는 촌민들이 돌아와 회의를 열고 다시 돌아간다. 또 시내에 살고 있지만 마을에 채마밭을 다루는 사람도 있고 나머지 부분은 촌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대신 다뤄 묵여둔 밭은 없었다.
전삼룡(62세) 회장에 따르면 촌에 회의결책은 로인협회의 동의를 거쳐야 할 정도로 로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현재 신흥촌은 래년부터 주식경제합작사가 가동된다. 촌민들이 가입해 토지의 초과부분 면적의 리익을 합작사에 바쳐 촌에 일부 남기고 나머지는 매사람 앞에 리익을 배분(分红)하는 형식으로 운영된다. 이에 맞춰 육모하우스도 수십동 세워 일부분은 마을에서 사용하고 대다수는 외부에 도급주고 있다.
생활이 좋아지면서 다른건 다 좋은데 최근년간 벼값이 내려가서 농민들이 좀 고심하고 있는데 수매가격이 좀 오르기만 하면 대다수 규모화 농사를 하기 때문에 살멋이 있을것이라고 촌민들은 말했다.
/마국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