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빈시 아성구 성건촌은 할빈지역에서 최대의 조선족촌이며 흑룡강 나아가서 전국적으로도 가장 큰 조선족촌의 하나에 속한다. 현재 호적상으로 1115호에 인구가 2356명에 달하며 경작지 면적은 7000여무에 달한다. 한때 문명촌으로, 살기좋은 고장으로 원근에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성건촌은 일제강점시기 일본관동군의 군사기지였는데 일본이 투항한후 1947년 조선의용군 아성지방부대에서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개척하였다. 1948년 부대가 남하하면서 당시 현정부에서 방청(경작자와 소유자가 생산량을 분할하는 방식)을 놓게 되자 조선족농호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게 되였다. 1950년 방청제가 페지되고 토지가 농사짓는 농호에 배분되면서 상지, 연수, 목란 등지의 조선족 이주민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초창기에는 조선족마을이 없었기 때문에 한족마을인 성교촌에 입적하여 조선족소조로 있다가 1951년 독립하여 성건촌이 생겨났다.
수재, 한재 등 자연재해가 거의 없는 성건촌은 토질이 비옥하고 할빈시주변의 생활용수 주요수원지인 금천호(서천안저수지)의 물을 관개수로 사용하여 이곳에서 생산하는 쌀은 밥맛이 좋기로 소문이 높다. 부동한 시기 박동찬, 강선규, 주명달, 남제, 박재근, 김룡덕, 김시현 등 촌간부들이 촌민들을 이끌고 노력한 보람으로 성건촌은 흑룡강성적으로 비교적 잘사는 마을로 이름을 날리게 되였다. 현재는 당지부서기 겸 촌주임 진학봉(62)씨를 비롯한 촌지도부가 성건촌을 이끌고 있다. 진학봉당지부서기는 1999년도 부터 지금까지 22년간 당지부서기를 맡고 있다.
진학봉당지부서기의 소개에 따르면 성건촌의 인구당수입은 1997년 2300원에서 지금은 3만원에 달한다. 현재 촌에 남아 있는 조선족인구는 100명 미만이다. 한국이나 외지로 돈벌러 나가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토지가 농사짓는 농호들에 집중되고 있는데 현재 평균 한집에서 80-100무를 다루고 있어 규모화농사의 기틀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현대화 농업기지를 세워서 농사도 기계화로 하고 온도검측, 관개가 전부 자동화로 되여 있다.
“조선족학교도 전에는 마을마다 있었는데 지금은 전 아성에 하나밖에 안남았고 옛날에는 한개 소대에만 조선족이 200가구씩 되였는데 지금 어떤 소대는 2가구도 안남았다”고 인원 류실에 대하여 진학봉당지부서기가 아쉽게 말했다. “각촌에서 인원 류실 현황에 정책도 도시화로 나가기에 다른 지방의 선진적인 면을 배워서 토지를 집중해 촌에서 직접 관리하고 ‘토지를 주식으로 합작사에 가입하는’ 방식의 합작사를 발전시켜야 생존, 발전할 수 있다”고 진학봉당지부서기는 강조했다.
그는 “현재 조선족촌들은 소유하고 있는 땅이 많아서 그것을 조합해 합작사를 발전시켜야 한다. 합작사야 말로 농호들의 리익을 지켜주고 토지의 류실을 막는 최선의 선택이다. 뭉쳐야 살고 뭉쳐야 발전할수 있다”고 말했다.
력사적으로 내려오며 성건촌은 시종 아성의 조선족 경제, 문화, 교육의 중심지였다. 진학봉당지부서기를 주도로 하는 촌지도부의 올바른 결책으로 성건촌은 발빠르게 움직여 2004년부터 아스하농민합작사를 설립, 발전시켜 다른 촌들의 본보기로 되여왔다. 당시 할빈시 시위서기를 담임했던 두우신시위서기는 성건촌을 시찰하고 다른 촌들도 성건촌을 따라 배워 합작사 모식의 발전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올해 성건촌에서는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길수리도 하고 나무와 꽃을 심어 마을환경을 미화하였으며 버스정거장도 새롭게 건설했다.
진학봉당지부서기는 “선조들이 개척한 마을을 유지하려면 외지에 있든 고향이 남아있든 불문하고 모든 촌민들이 다 함께 지혜를 모아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