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돌릴사이 없이 팽이처럼 돌아친 삼월이다. 출근하느라 그리고 주말에는 두 아이의 뒤바라지로 눈코뜰새가 없다. 주위 사람들은 아들 딸이 다 있어 세상에 이보다 더 행복한 것이 어디 있는가 라고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조용히 웃군 한다. 힘들다는 대답은 자칫하면 변명이나 응석부림으로 들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대학입시를 앞둔 아들애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여 일상 생활을 챙겨야 하는 엄마로서 정신상 육체상 쉽지만은 않지만 아들 앞에서는 항상 밝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쓴다.
그러다보니 년로하신 친정부모님과 시부모님들한테는 직접 찾아가보지도 못하고 매일 영상통화나 안부전화만 한다. 바쁘다는 리유로 그리고 코로나 핑계로… 그리하여 청명절 련휴에 오랜만에 고향에 가게 되였다. 부모님 얼굴도 보고 할아버지 산소에 가서 성묘도 하려고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설쳤다. 그러다보니 아침 6시반쯤 엄마네 집에 도착했다. 엄마는 벌써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한상 차려놓았다. 신체가 나빠서 금방 퇴원한지 며칠 안되였지만 딸과 사위가 온다는 말을 듣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엄마의 뒤모습을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찾아보지도 못한 불효자식이지만 엄마는 항상 우리가 즐겨먹는 음식을 만들어주신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우리 엄마의 손맛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똑같다.
엄마의 손맛이란 참 신기하다. 누구에게나 엄마표 음식이 있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엄마표 김치와 된장찌개, 장졸임, 무우와 오이장아찌, 칼치무조림, 닭고기조림, 가지와 배추 그리고 고추를 듬뿍 넣어서 매콤하게 졸여낸 물고기료리, 파릇하게 데쳐낸 시금치와 땅콩무침 그리고 땅콩볶음과 계란볶음까지… 생각만 해도 군침이 입안에 사르르 돈다. 결코 부유하지 않았던 농촌생활이였지만 엄마는 하루 세끼 밥상을 알뜰하게 차려내셨다. 석탄불을 지펴서 밥을 지어야 하는 엄마는 매일을 하루같이 새벽에 일어나야만 했다. 날씨가 따뜻한 여름날은 그나마 괜찮지만 령하 25도 이하인 강추위날에는 부엌 아궁이에서 타다 남은 재를 끌어내다 버리고 다시 짚과 석탄을 날라들여 불을 지피고 석탄을 태워 김을 몰몰 올려 밥을 지어야만 했다. 피여오르는 연기를 먹어 워낙 기관지가 좋지 않았던 엄마의 기침소리가 한참동안 부엌을 울렸다. 그렇게 우리집 아침밥상은 매일을 하루같이 오롯이 차려진다. 엄마는 자르르 윤기도는 새하얀 입쌀밥에 따뜻한 국, 한두가지 볶음채와 정성들여 만든 맛갈이 넘치는 김치들로 밥상을 풍성하게 만들어낸다. 거기다가 나와 녀동생의 도시락까지 챙겨야 했다. 엄마표 도시락 음식 중에서 빠지지 않고 챙겨다녔던 료리가 두 가지가 있다. 땅콩볶음과 오이장아찌였다. 부드럽고 고소하게 기름에 굴려낸 땅콩볶음, 손수 농사지은 오이를 깨끗이 씻고 알맞게 소금에 절여서 돌로 눌러 물기를 빼고 적당히 말리워 기름고추가루와 양념에 무쳐낸 장아찌는 입에 넣으면 아삭아삭, 아 너무 황홀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라 엄마는 도시락을 준비할 때 다른 볶음요리에 곁들여 이 두가지만은 빼놓지 않고 챙겨주셨다.
오늘도 나는 이 두 음식의 맛에 집착한다. 초중시절 엄마가 한국에 가 계시는 동안 땅콩볶음을 하려다가 새까맣게 태워버린 적이 있다. 지금도 회식 장소에서 남들이 술안주로 주문한 땅콩볶음에서 나는 옛날 엄마맛을 찾으려고 씹고 또 씹어본다. 오이장아찌도 흉내내여 담가보지만 그 맛을 제대로 살릴 수 없다. 하지만 그 순간마다 추억의 맛, 환상의 맛이 내 머리 속 입맛에 내려앉아 나에게 미적인 감동을 선물하며 전률을 일으킨다.
우리의 입맛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은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진미에 놀라고 감탄하며 모멘트에 그 향을 날려보내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입맛도 고향을 찾는 날이 올 것이다. 바로 엄마의 손맛이다. 아이들이 성장하여 어른이 되고 나면 추억이 양념이 되여서 그들의 입맛에 아름다움과 감동을 살려낼 것이다.
나도 우리 엄마처럼 우리 아들딸에게 추억의 료리를 많이 만들어줘야겠다.